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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기도설 May 13. 2024

전복

- 딸 사랑 

가락수산시장 새벽 3시.

아빠가 수산시장에 가야겠다고 했을 때 

"아빠, 저랑 꼭 같이 가요"

남편에게 "혹시 내가 애들 유치원 등원 전에 못 올 수도 있으니, 애들을 잘 깨워야 한다."
부탁하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친정 아빠와 단둘이 처음 외출을 했었다.


아빠는 그날 무척 결연한 의지에 찬 얼굴로 가는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7남매의 둘째다. 아들 셋, 딸 넷 중에 둘째다.

스무 살에 혈혈단신 한양 땅에 올라와서 자수성가하였고, 딸 둘을 두었다. 

그 7남매 중 유일하게 아들이 없는 집, 


큰고모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는 다른 형제들은 모두 아들 형제, 삼 형제를 두었다. 

일 년에 몇 번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시거나, 친척들이 서울에 오면 지극정성 밥상을 차리고, 대접을 융숭하게 하여도 

"아들이 없어서 어째"

서슴없이 엄마에게 찌르며 해대곤 했었다.


아빠는 서울살이에 애들 셋은 무리라며 

"내가 안 낳는 것인데 별참견"

다른 일로 부부싸움을 하여도 아빠 앞에서 엄마에게 "아들이 없어서"라는 말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곤 하셨다. 그래도 참 시누이들은 못 말리는 법이다. 가슴을 후벼 파며 쑤셔 댔었다. 


고모들은 그래도 우리에게는 이미지 관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특히 7남매의 가장 큰 조카인 내게는 자주 말하곤 하였다.

"너의 아빠가 너를 바닥에 내려놓은 적이 없다. 시골에 와서도 밤새 깊이 잠들 때까지 너를 안고 재우고 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그저 듣기만 해도 사무친다. 


내 몸에 스며들어 있었을 사랑. 그리고 그건 참 힘이 된다. 


큰손주가 태어났을 때 엄마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만세가 아들 둘 둔 시어머니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아들 타령에 얼마나 마음이 다쳤을까!


둘째를 임신했었을 때, 같은 동네 사는 내 동생에게 나는 미안했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유산 이후에는 동생의 병원 살이 마음 아픔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동생은 결혼 후 8년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았고, 3년 후부터는 전국에 안 가본 데 없이 자식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흔이 넘으신 증조 시할아버지가 계신 경상도 집안에 뭐라는 사람 없어도 조카가 태어난 그 순간까지 엄마와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허상에 흔들리는 동생을 어떻게 다독이나, 누구도 쉽사리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전복을 참기름에 볶아 찹쌀 보자기를 담가두고 달여 먹이면 좋다고, 아빠가 저녁 식사 때 엄마에게

 "스무 마리를 살까? " 옆에서 듣던 나는 "아빠, 내가 살게요" 하고 길을 나섰다. 


손바닥 크기만 한 자연산 전복 서른 마리를 사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별짓을 다 해도 안되던 일이 이후 두 달 뒤쯤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나는 전복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주변에 세 명이 임신을 해서 이쁜 아가를 만났다. 


조카를 만난 그 순간까지 동생이 감당했던 주삿바늘. 한약. 마음 앓이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리 만난 조카 전봉이. 태어나서도 전복을 좋아해서 열 살까지도 내가 '전봉이' 애칭으로 부르며 장난을 치곤 했다. 


아미가 어여쁜 울 조카가 내일 초등학교를 졸업한단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건강해라!  전복이! 전봉이!


* 위 사진은 2024년 4월 전복밥입니다. 


전복보약 레시피 

1. 전복 15마리 정도를  깨끗이 씻어 이를 빼고, 내장과 분리합니다.

2. 남비에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볶습니다.
3. 불린 찹쌀(한 줌)을 면보자기에 싸서 남비에 담가 주세요. (불린 찹쌀 그대로 넣기도 함) 
4. 볶은 전복과 찹쌀에 물을 붓고 약불로 달입니다. 
5. 갈색으로 변한 약물을 일주일간 아침저녁 한 컵씩 마시면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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