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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스물여덟살의 뉴질랜드 워홀

by 너나나나

한국에서 4년제 물리치료학과를 1년 휴학 포함 5년에 걸쳐 졸업한 후 바로 취직하여 집 근처 병원에서 3년간 물리치료사로 근무했다. 그 후, 27살 청춘의 나이로 미련 없이 세계여행을 떠났다. 1년 2개월 동안의 길었던 여행은 남미 칠레를 끝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지만 오세아니아 대륙을 가지 못했던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아, 나이 제한으로 이제 곧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중에 잠시 고민했지만 호주는 인원 제한 없이 나이만 맞으면 누구든지 갈 수 있었고 뉴질랜드는 나이 제한도 있었거니와 1년에 3천 명 정원으로 선착순 선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결국 뉴질랜드를 선택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곳보다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을 가길 원했던 나의 청개구리 심보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더불어 유럽 아이슬란드를 여행할 적에 이런 비슷한 자연을 가진 나라에 가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누군가 뉴질랜드를 추천했고 나의 마음속에서는 그때부터 언제나 뉴질랜드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2019년 6월, 세계여행을 하면서 메고 다녔던 45L 배낭가방 하나와 이민가방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천 가방을 가지고 호기롭게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직항은 비쌌기 때문에 중국 광저우를 경우 하는 비행기를 선택했고 무리 없이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세계여행 할 때 돈을 아끼며 다니던 거지 근성 탓에 숙박비를 내지 않는 카우치서핑으로 숙소를 해결했고 비교적 택시보다 저렴한 공항버스를 타고 오클랜드 중심에서 살짝 남쪽에 위치한 카우치 서핑 집으로 향했다. 카우치서핑은 현재 유료화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무료였기 때문에 내가 숙소를 찾는 가장 첫 번째 수단이었다. 에어비앤비랑 비슷하지만 손님이 숙박비를 내지 않고 대신 집주인과 같이 여행 이야기를 하거나 요리정도를 해 주는 느낌의 숙박 플랫폼이었다. 또한 집주인은 보통 여행을 많이 해봤던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여행하며 받았던 타인의 호의를 카우치서핑을 통해 다른 여행객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선행 플랫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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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날 밤부터 시작됐다. 초행길이다 보니, 내려야 하는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두 정거장이나 더 지난 곳에서 배낭가방과 이민가방을 들고 어렵게 하차했다. 지도를 보니 카우치서핑 호스트 집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였고 로컬 버스를 타자니 버스 카드도 없고 우버 택시를 타자니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세계여행 짬이 얼만데 이 정도 못 걷겠어?' 천천히 무거운 짐을 끌며 걷기 시작했다. 이민가방은 케리어와는 다르게 가방 속 내용물이 많아 무거워지면 바퀴 휠이 너무 작아서 쉽게 밀거나 당겨지지 않는다. 그렇게 가방을 끌고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는 고행이 시작됐다. 걷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해가 지기 시작했고 40kg에 육박하는 나의 가방들을 가지고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는 그 길은 고행길에서 이내 곧 지옥길로 변했다. 겨울이었던 뉴질랜드 6월 날씨에 나는 땀을 주룩주룩 흘렸고 안간힘을 쓰면서 짐을 끌고 있었다. 40분이 지나도 카우치 서핑 호스트 집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이민가방은 싸구려 천이라서 그런지 바퀴는 이미 고장 나 있었고 가방을 질질 끌어서 그런지 그 안에 있는 내 짐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만큼 구멍이 여기저기 생겨있었다. 땀을 한 바지 흘리면서 가방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면서 갑자기 화가 났다. 끌고 가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 친 후 그 밤거리에 서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당연히 아무도 서 주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 한 걸음씩 옮겨 1시간도 넘게 걸려서 호스트 집에 도착했다. 이런 내 처량한 신세를 알리 없는 집주인은 집에서 여유롭게 TV를 보다가 나를 맞이했다. 인도인 젊은 부부였는데 집에 손님을 위한 소파나 침대가 따로 없어, 나를 위한 에어 매트리스를 거실바닥 위에 깔아주었다. 딱히 이불을 제공해 주거나 히터를 틀어주거나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져갔던 침낭을 에어매트리스 위에 깔고 잠을 청했다. 뉴질랜드 집들이 겨울에 이렇게나 심하게 추워지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나라에 전체적으로 단열처리가 안 되는 오래된 집들이 많아서 겨울에는 밖에 날씨보다 집 안이 훨씬 추웠다. 그날 밤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미국 옐로우스톤 로드트립을 하면서 작은 여름 침낭에서 자다가 입이 돌아갈 뻔했던 그 추위와 동일한 추위를 그 에어매트리스 위에서 느꼈다. 입을 덜덜 떨면서 가져갔던 옷들을 겹겹이 입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밤을 새웠다. 혹독하게 워홀 첫날밤을 치른 나는 도저히 그 집에서 지낼 수 없어, 바로 다음날 두 번째 카우치서핑 주인집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나의 우당탕탕 워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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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세 번째 카우치서핑 호스트들 집을 거쳐 마지막 호스트였던 인도인 아밋이라는 남자의 집에서 1주일 넘게 지내게 되었다. 집에 소파도 있고 히터를 제공해 주어 따뜻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밋은 나 같은 여행객들을 집에 재워주면서 인도 음식과 문화를 소개해주었고 자신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에는 직접 운전해서 오클랜드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아밋은 뉴질랜드에 사는 인도인으로 부수업을 위해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우리가 집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어디 구경 다니는 것을 모두 영상을 남겨 유튜브에 올리곤 했다. 한 번은 집에서 함께 인도 음식을 시켜서 먹은 후 인도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유튜브에 올렸고, 아밋의 말로는 그 영상이 자기 채널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은 영상이라며 나에게 고마워했다. 아밋의 집에서 지내면서 오클랜드 시티 중심에 위치한 새로 생긴 'SO/ Hotel'이라는 5성급 호텔 청소부로 취직을 했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보고 이력서 (CV)를 냈고 며칠 뒤 영어 인터뷰를 본 후에 결과적으로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현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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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에서 다수가 함께 사는 형태를 '플렛'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집들을 찾을 수 있는 웹 사이트(트레이드미)를 통해 시티 중심에 위치한 한 플렛을 찾았고, 호텔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날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호텔에서 걸어서 5-10분 거리에 위치한 4층 건물이었는데 창문도 없이 2층 싱글침대에 1인용 책상이 전부인 아주 협소한 방에서 2명이 함께 살았다. 나의 첫 번째 룸메이트는 일본인 여자로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로 뉴질랜드에 왔다고 했다. 일주일에 공과금 포함 인당 165불 (한화 대략 12~13만 원)을 내면서 지냈는데 그나마 그 방이 오클랜드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었다. 그 집에는 총 4개의 방과 2개의 화장실이 있었고 방마다 2층침대가 있었기 때문에 최대 인원 8명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플렛메이트(함께 사는 사람들)는 인도, 일본, 독일, 피지, 한국, 인도네시아 등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로 이 나라에 온 사람들이라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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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과의 함께 같은 집에 사는 것도, 호텔에서 청소일을 배우면서 일을 하는 것도, 쉬는 날에는 집 근처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다니는 것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재밌었다. 영어만 말하면서 일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고 그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열심히 연습해 왔던 영어 실력을 뽐낼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온갖 영어 말실수에도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더 얻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즐거움이 시들해지고 남의 똥오줌을 닦는 일이 점점 하기 싫은 일이 되기까지는 딱 3개월이 걸렸다. 호텔에서의 주된 업무는 메인 로비, 룸 복도, 라운지, 식당, 바, 이벤트실, 엘리베이터, 공용 화장실을 빛이 나게 닦고 먼지하나 남기지 않도록 청소기를 돌리는 일이었다. 5성급 호텔이었기 때문에 지문 하나라도 있으면 다시 불러서 청소를 시켰고 식당에서 손님이 흘린 음식물은 식당 직원의 몫이 아닌, 나의 몫이었다. 호텔 곳곳에 있는 공용 화장실은 내가 일하는 업무시간에만 3,4번씩 들러서 확인하고 청소를 해야 했고 그 전날 파티가 있었던 바와 라운지 청소는 그다음 날 일하는 나의 몫이었다. 내가 혼자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른 부서 직원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나에게 대하는 태도들에서 내가 이 호텔에서의 위치가 그들보다 낮은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더 이상 호텔 일을 지속할 수 없었다.


호텔에서 일하면서 일주일에 약 50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을 벌었다. 3개월 동안 일주일에 40시간씩 일해서 약 600만 원을 벌었는데 거기서 방세와 식비를 제외하고 아끼고 아껴서 대략 400만 원 정도를 모을 수 있었다. 청소일을 관두고 방세를 내기 위해 빨리 다른 일을 구해야 했으나 생각보다 현지 잡(뉴질랜드인이 사장인 가게)을 구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고 그러면서 방세와 식비로 돈이 점점 깎여나가고 마음이 급해지면서 할 수 없이 한인 잡(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사장인 가게)을 구하게 됐다. 한인 잡을 찾는 것은 현지 잡을 구하는 일에 비하면 매우 쉬운 일이었고 그렇게 식당 서빙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는 12월 말에서 1월 초까지 전국적으로 모든 상점이나 식당이 문을 닫고 휴가를 가기 때문에 나도 이 시기를 활용하여 한국에 있는 엄마를 뉴질랜드에 초대하여 함께 3주 동안 여행을 했다. 그동안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엄마랑 둘이 남섬 여행을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의 여행이 끝난 후 모아 놓았던 돈을 다 써버린 나는 또다시 구인난에 직면하고 싶지 않아 한인 잡을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그리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병행하며 밤낮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두 일 모두 파트타임으로 나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한인 초밥 가게에 주말마다 출근했다. 평일에는 한인 식당 서빙과 현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주말에는 초밥가게에서 초밥을 만들어 팔고 설거지도 하는 일을 하면서 일주일을 하루도 쉬지 않는 일정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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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일 모두 최저 시급 약 18불을 받고 일했는데 교통수단을 병행하며 나는 작은 중고 전동 스쿠터 하나를 사서 하루에 1시간 넘게 스쿠터를 타면서 일을 다녔다. 세 가지 일이 오클랜드 시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는 서쪽에, 하나는 동쪽에, 하나는 남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오클랜드 남쪽으로 이사를 와야 했다. 6개월 동안 정들었던 나의 첫 플렛(타인과 함께 거주하는 집)을 나오면서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리곤 이사를 간지 얼마 되지 않아 2020년 1월 2월 코로나바이러스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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