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뷔폐에서 홀 서빙 언어 교환에서 만났던 제약회사 사장님 덕분에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그만두고 제약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나의 평일 하루 일과는 이러했다. 오전 8시에 일어나서 전동 스쿠터와 기차를 타고 9시 전에 제약회사에 도착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장비들을 점검하고 제조실과 사무실 청소, 복사, 스캔, 등 각종 잡동사니일을 한다.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직책이나 해야 하는 업무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일이 없을 때는 회사 서류 읽고 번역하기, 제약회사 전문 용어 공부하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후 3시에 일을 마친 후 전동 스쿠터와 기차로 40분이 걸려서 한인 식당에 도착한다. 식당 출근 시간보다 미리 도착해서 식당 테이블과 홀 바닥을 닦은 후 각종 냉동 고기를 기계에서 썰고 홀에 갖다 놓는다. 뷔페였기 때문에 사장님이 전날 미리 만들어놓은 밑반찬을 냉장고에서 가져와 홀에 진열하고 5시에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손님 전화 주문을 받는 동시에 비는 음식들을 주방에서 가져와 계속 채워 넣어야 한다. 밤 9시에서 9시 30분 사이에 드디어 저녁 먹을 짬이 나면 남은 뷔페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10시 15분에서 25분 사이에는 상태가 나쁘지 않은 남은 음식들을 냉장고에 다시 넣어 보관한 후 주방 바닥을 걸레로 닦고 나면 업무가 종료된다. 집에는 다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일이 늦게 끝나면 그냥 스쿠터로 달려서 집까지 가야 했다. 그렇게 집에 오면 대략 11시에서 11시 30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동선이 너무 길어져서 나중에는 300만 원짜리 작은 중고차를 구매해서 다녔다. 밤늦게 집에 오면 저녁밥 먹은 지 2,3시간도 안된 시간이지만 피곤하니까 샤워하고 잠 자기 바빴다. 한인 식당에서 만드는 음식들은 MSG와 설탕이 대량 들어가서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이었지만 힘들게 일하다가 늦은 저녁에 밥을 먹다 보니 배가 고파 많이 먹게 되고 소화가 다 되지도 않은 채 잠을 자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소화불량이 되는 일이 잦아졌다. 나중에는 소화 불량이 심각한 수준으로 번져 복통으로 이어지는 날이 많아졌고 물만 마셔도 소화가 안 되는 날도 있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한국에 가자마자 검사를 했는데 쓸개에 돌이 가득 차 있다고 하여 바로 수술을 하기도 했다.
초밥 가게에서의 일은 재미있다 주말 일과는 비교적 양호한데, 아침 9시에 초밥가게에 출근해서 점심시간 30분을 포함해서 약 9시간 근무를 한다. 집에 오면 오후 6시 30분 정도가 되고 저녁밥 요리해서 먹고 정리하고 나면 어느새 밤 9시가 다 된다. 나랑 나이가 비슷한 또래 워홀러들이 초밥 가게에 있기도 했고 거의 최저 임금이었지만 일이 그리 어렵지도 고되지도 않았기에 이곳에서 일하는 것은 재미가 있었다. 제약회사, 식당 홀 서빙, 초밥까지 일주일 내내 쉼 없이 일하는 와중, 제약회사가 직원들 임금을 지불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사정이 안 좋아진 탓에 사장님의 권유로 제약회사 근무시간을 줄이고 대신 핸드폰 케이스를 중국에서 납품해 오는 중국인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약회사를 나가는 날이 적어지긴 했으나 중국 회사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임금은 제 때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만 하면서 지내던 중 워킹 홀리데이 비자 만료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일하던 곳들을 전부 그만두고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행히 중국 회사에 물어보니 내게 워크비자를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하여 나는 바로 비자 신청을 도와주는 변호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워크비자를 준비해서 신청하는 비용 250만 원가량을 누구의 도움 없이 내가 다 지불해야 했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이 나라에 남고 싶었다. 아직 제약회사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대로 다 그만두고 한국에 가기가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내가 중국회사에서 워크비자를 받으면 비자 규정상 비자를 지원받은 해당 업장 이외에 다른 일들은 모두 그만두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제약회사까지 그만두게 되면 내가 뉴질랜드에 머무르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제약회사 사장님은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회사 사정은 어려웠지만, 중국회사가 아닌 자신의 회사를 통해서 워크비자를 신청하라며 내게 손을 내밀어 주셨다. 워크비자를 신청하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첫째, 신청하는 해당 업장이 아닌 곳에서는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둘째, 업주는 해당 노동자에게 최소 시간당 27불 (한화로 약 2만 2천 원)을 지불해야 하며 주 30시간 이상을 보장한다.
셋째, 업주는 해당 노동자에게 워크비자를 지원해 주기 앞서 뉴질랜드 현지 구인공고 사이트에 광고를 올리고 일정 기간 게시물을 게시함으로써 해당 업무에 적합한 현지인이 있는지 먼저 물색해야 한다.
위 3가지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 사장님은 나의 시급을 25불에서 30불로 올려주었고 주 30시간을 보장해 주셨다. 원래 맡고 있는 직책이나 임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이 같은 제안은 나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안면몰수하고 이 나라에 머물기 위해 사장님께서는 더 열심히 일을 찾아서 보답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비자를 신청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신청자 본인이 직접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 둘째는 변호사나 조력자(보통 비자 상담 자격증이 있는 사람)를 찾아서 비용을 지불하고 대신 신청서를 작성하게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신청비 이외에 들어가는 비용은 없으나 영어 원어민이 아니면 혹시나 영어를 잘못이해하고 엉뚱한 자료를 첨부하거나 신청서에 있는 질문 내용에 잘못 답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다. 또한 비자 신청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어떤 자료를 어떤 형식으로 정리해서 신청서에 첨부해야 하는지 등 난감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변호사나 조력자에게 상당 금액의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에 완벽한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다. 물론 비자 신청 자격요건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비자 승인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격 요건이 되지 않아도 변호사나 조력자는 비자 승인이 날 수 있는 다양한 다른 방법들에 빠삭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확실히 비자를 받고 싶을 때에는 이렇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번에 워크비자를 받지 못하면 이 나라에서 퇴출되는 상황이었기에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에 비자 상담사를 고용했다. 고용 비용과 비자 신청 비용까지 하면 약 한화로 250만 원이 들어갔는데 3개월 정도가 지나고 드디어 비자 승인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3개월 동안 혹시나 승인이 안 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면서 최악의 상황에는 여행비자나 학생 비자 같은 거라도 받아서 기다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결국 받아낸 워크비자.
뉴질랜드라는 낯설고도 먼 나라에 와서 간신히 받은 워크비자. 제약회사 사장님을 운 좋게 만나서 퇴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서 그동안 다니던 다른 아르바이트들을 모두 관두고 제약회사 하나만 집중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시급이 올라가면서 직책도 부여되었다. 나의 직책은 Operations Officer으로 약 제조에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 및 수령하고, 절차대로 약 제조를 시행하며 장비 시설 점검을 위해 외부 업체와 연락하여 일정을 조율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에는 비즈니스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서 항상 기죽어 있고 자신감도 없었는데 책임감이 늘어나고 전문 용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 옴으로써 외국인들과 전화를 하거나 미팅을 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이 회사에서 무려 4년 가까이 일했다.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워크비자로 뉴질랜드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면서 나의 뉴질랜드 체류 여정 역시 이어지게 되었다. 제약회사 관련하여 아무런 기술이나 배경지식이 없었지만 나의 가능성과 성실함을 보고 투자 해 준 사장님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나는 내가 단순히 운이 좋아서 워크비자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장님은 계속 머물고자 열망하면 그 방법이 생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머물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일을 하는데 썼다. 최저임금이라고 무시하지 않았고 개미처럼 일을 열심히 하면 돈도 모으고 보람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불 물 안가리고 일을 하던 중 우연히 마주했던 제약회사 사장님, 제약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도 나는 밤남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성실히 돈을 모았다. 그런 나의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을 높게 평가해주셨던 걸까, 회사 사정이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워크비자를 지원해주셨다. 나는 그 지원과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4년 동안 가능하면 병가도 거의 내지 않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출근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고,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가서도 회사 관련 전문지식을 습득하는데 게을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일 했지만 뉴질랜드에 온 그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대학교에서 배우고 병원과 학회를 오가며 습득하고 연습했던 기술들 모두 이곳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물리치료사였다는 타이틀 덕분에 뉴질랜드에서 그 어떤 일을 하든 당당하게 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제약회사 사장님을 만났고 워크비자까지 받았다.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탈때만 해도 당연히 1년만 있다가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워크비자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워크비자를 받을 때만해도 나의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람 인생은 정말 두고 볼 일이다.
나는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를 품고 뉴질랜드와의 인연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