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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의 절반은 코로나 바이러스

코로나 바이러스 수혜자

by 너나나나


20191206_230425.jpg 하루 알바로 만나는 전 세계 워홀러들

식당 서빙 (주 24시간), 식당 설거지 (약 주 20시간), 초밥가게에서 초밥 만들기와 설거지(약 주 15시간)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했던 각종 하루 알바까지 하면서 일주일에 쉬는 날 없이 일했다. 그러던 중 짬을 내어 하루는 언어 교환 모임에 나갔다가 어느 미국 한인 교포 아주머니를 만났다. 내가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를 하다가 뉴질랜드에 워홀로 와서 청소나 설거지를 하면서 지낸다고 하니까 자신이 작은 제약회사를 오클랜드(뉴질랜드의 가장 큰 도시)에서 하고 있는데 자기 회사에서 같이 일해보자 하셨다. 나는 당연히 일을 같이 해보고 싶다 말했고 하루 알바를 줄이고 제약회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돈이 없기도 했거니와 이미 오클랜드에서 가볼 만한 곳은 어느 정도 다 가봤기 때문에 쉬는 날이 있어도 딱히 할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놀면 뭐 하냐는 생각으로 일을 하나씩 늘리다 보니 어느새 여러 군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총급여는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인센티브를 받으면서 주 5일 근무를 하며 받던 돈이랑 비슷했다.


DSC05897.JPG 락다운 후 유령도시가 된 오클랜드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만 하고 지내던 나날 중 2020년 초,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로 홍역을 앓기 시작했다. 그 당시 총리였던 자신다 아던은 신속하게 락다운(국경 봉쇄 및 시민들의 이동 제한)을 결정했고 이러한 신속한 판단으로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초기에 막은 방역 선진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락다운으로 인해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직업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재택근무 혹은 국가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으며 집에서 쉬게 됐는데 국가는 일했던 시간에 따라 노동자에게 지원금을 차등 지급했고 나처럼 일을 많이 하고 여러 군데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만큼 지원금을 더 많이 받았다. 나는 사실 코로나바이러스 락다운 시절이 가장 평온하고 금전적으로도 안정적인 시기였다. 원래 최저임금을 받고 일을 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노는데도 거의 내가 일해서 받았던 급여 수준만큼 국가 지원금을 받게 됐다. 돈이 주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걸 볼 때마다 정말 너무나 기뻤다. 코로나가 하루빨리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일도 안 하고 돈을 받는 이 생활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내 주변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돌아가시거나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도 못한 친구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회사에서 강제로 퇴사를 당하거나, 하필 코로나 바이러스 직전에 일을 관두고 잠시 쉬고 있던 사람들은 국가 지원금조차 받지 못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 시국에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수혜자였다. 락다운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는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태어나서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는데 이렇게 돈을 꽤 오랫동안 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천국 같은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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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설거지

락다운이 걸린 지 몇 달 후, 다시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식당 주방장은 인도사람 암릿이라는 인간이었다. 여러 번 문제가 생겨서 얼굴 붉히는 일이 잦았는데 한 번은 누군가의 실수로 냉동 치킨이 냉동실이 아닌 실온에 방치되었고 암릿이 내 탓을 하면서 나에게 그 냉동 치킨 값을 내 임금에서 삭감하겠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만두었다. 뉴질랜드 사람이었던 식당 주인에게 그동안 암릿이 내게 했던 언행을 고하고 내 임금을 주방장이 삭감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말하자 식당 주인은 자신은 절대 직원에게 그런 일에 대해서 지불하라고 하지 않는다며 암릿이 했던 언행에 대해서 내게 사과를 했다. 암이 생길 것 같았던 암릿과 함께 일했던 그 식당은 코로나 바이러스 락다운이 풀리고 난 후 그 냉동치킨 사건으로 그만두었다. 결과적으로 설거지 일을 했던 8개월 중 정작 제대로 일을 한 건 5개월 정도, 락다운에 걸리면서 일을 하지 않고 정부 지원금을 2,3달 동안 받으면서 살았다. 지원금이 끝나고 다시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거의 바로 그만두었기 때문에 식당 주인에게 미안할 법도 했지만 암릿에게 겪었던 것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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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다운은 풀렸지만 외출을 할 때에는 무조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오전에는 제약회사, 오후에서 밤까지는 식당 서빙, 주말에는 초밥가게에서 일하며 거의 일주일 내내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다. 그러던 중 친구를 만나 밥을 한번 같이 먹었는데 그 친구에게서 바이러스 균을 얻어 일주일 동안 다시 일을 못하고 집에만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나는 또 국가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내가 직접 코로나에 걸렸다는 사실이 달랐다. 처음 하루 이틀은 고열에 시달렸고 주변에 돌봐주는 사람 아무도 없이 나 홀로 견뎠다. 아직 뉴질랜드에는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시기였음으로 같은 집에 살던 말레이시아인 남자 플렛메이트는 나를 마치 벌레 보듯이 대했고 내가 주방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타지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게 참 서럽고 어려운 것이구나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 친구들은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막상 또 그게 쉽지 않았다. 나 혼자 작은 방 한편에서 통증을 삼켜내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은 거의 정상으로 완치되었고 다시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천국이기도 하고 서러운 시간이기도 했던, 그리고 나의 워킹홀리데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코로나바이러스. 그렇게 1년 비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갔고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내가 뉴질랜드에 머물 운명이었을까, 제약회사 사장님의 도움으로 나는 그 어렵다던 워크비자 신청을 하면서 뉴질랜드와의 인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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