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 워크비자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일주일에 최소 65시간 이상씩을 일을 했지만 대부분의 일터에서 최저임금을 받았기 때문에 정작 버는 돈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돈을 떠나서 삶의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한국어를 가르쳐보자는 것이었다. 호텔 알바를 하면서 혹시 몰라 이수했던 온라인 한국어 지도사 민간 자격증을 활용해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Tutoroo라는 사이트를 통해 나의 프로필 정보를 올렸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강의료는 한 시간당 한화로 약 13,000원 정도로 매우 싸게 책정했다. 그 덕분에 운이 좋게도 학생을 2,3명 받을 수 있었는데 Tutoroo의 장점은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나의 강의를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온라인으로 만났지만 집이 가까워서 대면해서 수업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중 어느 학생과의 첫 수업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제 갓 20살을 넘겼다며 아기 같은 얼굴을 한 남자 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마이클, 첫 수업부터 이미 한국어가 수준급이었고 한국어 온라인 수업이 처음이라 몹시 신이 나 보였다. 몸을 좌우 앞으로 흔들흔들 움직이며 '좋아요!' '그게 뭐예요?' '신나요'등의 말을 연발했다. 주위가 산만해 보이긴 했으나 수염 한 털 자라지 않아 귀여운 아이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계속 '귀엽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마이클은 단숨에 나의 귀여운 남자 동생이 되었고 우리는 같이 등산도 가고 밥도 먹으면서 친해졌다. 마이클은 키가 큰 백인 남자였는데 나랑 같이 놀면서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에 언제나 신나 했다.
마이클의 나이는 나보다 9살이 어렸고 남아공에서 가족 전체가 몇 년 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나는 마이클이 그저 귀여운 동생 같아서 더 허물없이 편하게 대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일로 받은 스트레스나 고민들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마이클한테서 카톡 한통이 왔다. '누나, 데이트할래요?'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누구랑?' 나는 당연히 마이클이 자기 지인 중에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싶냐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누구랑 데이트를 하냐는 나의 질문에 마이클은 '저랑!'이라는 문자에서 순간 얼음이 되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며칠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주변 친구들에게 상담을 받기도 했다. 한국어를 잘하는 영어 원어민, 키가 크고 잘생겼는데 착하기까지 하다. 직업도 좋고 그 어떤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나 보다 9살이 어리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이렇게 어린 사람과 만나도 되는 걸까, 나는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사서 내 가족을 꾸려야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는데, 이 친구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며칠이 지났고 답장을 주기로 약속했던 주말이 다가왔다. 일단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전에 거절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식당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첫 번째 데이트, 식당에 마주 않은 마이클과 나는 어색한 기류를 뚫고 내가 먼저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마이클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에 대한 마음이 커졌다고 고백했다. '누나가 좋다'라고 솔직 담백하게 말하는 마이클을 보면서 당최 이런 그림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나였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리기만 했다. 우리는 그 식당에서 서로의 가치관, 이상형, 지난 연애와 같은 이전에는 전혀 대화 화제가 되지 않았던 내용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식당이 문을 닫는 시간이 되었고 집으로 나를 데려주는 마이클의 차 안에서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마이클은 내가 절대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종종 만나서 놀 수 있는 친구사이라도 자기는 좋다고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데이트를 해 보자고 제안했다. 소개팅을 하면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적어도 2,3번은 만나고 나서 결정하는데 마이클은 내가 아끼고 너무 좋아했던 친구이자 동생이었기에 나이 차이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로 퇴자를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데이트, 첫 데이트보다는 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서로 친구로 지낼 때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서로의 가족과 학창 시절 이야기,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렇게 두 번째 데이트가 세 번째로 이어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밤늦게 오클랜드 시티 중심에 있는 하버 브리지 다리를 본다고 불빛 하나 없는 작은 공원에 갔는데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가려고 했을 때 공원 입구가 닫혀있어 진땀을 빼기도 했다. 여기저기 관리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12시 즈음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웃펐던 그날을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귀는 날로 하기로 서로 합의를 보았다.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하고 4개월이 지났을 때 마이클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독립을 하려고 준비를 시작했고 혼자 작은 집을 얻어서 살겠다고 하는 마이클에게 차라리 내가 살고 있는 렌트 집으로 이사를 오라고 권유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했다.
9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우리는 함께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다. 전 남자친구와 지지고 볶고 매일 싸우던 나였지만 마이클과 있을 때에는 언성을 높이며 싸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확실히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분명하다. 마이클은 대화하고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또한 매우 자상해서 항상 손을 잡거나 먼저 팔짱을 끼고, 일상화된 포옹과 뽀뽀는 기본이다. 행동뿐 아니라 '사랑한다 예쁘다 귀엽다' 등의 칭찬을 숨 쉬는 것만큼 자주 해주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에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를 잘하는 영어 원어민을 만나고 싶다는 나의 바람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행운인데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내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우리가 1년 이상 같은 집에서 살았을 때 제약회사 사정이 다시 좋지 않아 져서 회사에서 받은 워크비자로 연명하며 살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회사에서 직원들 임금을 지불하기 어려운 상황에 다시 놓이게 되었고 워크비자로 일을 하던 나 또한 예외 없이 주 1회 근무를 하게 되었다. 주 30시간 이상을 보장한다는 것이 워크비자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렇게 시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청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당장이라도 이 나라에서 쫓겨나도 아무 이상이 없는 상황이었다.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날수가 줄다 보니 예전에는 일주일에 65시간 이상씩 일하던 내가 일주일에 8시간도 일하지 않게 됐다. 워크비자 규정상 다른 업장에서는 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경제적인 압박을 점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더 이상 이렇게 불안하게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마이클과 나는 '파트너 워크비자'를 가능하면 빨리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파트너 워크비자는 내가 회사에서 받았던 워크비자와 다르게 별다른 제약이나 조건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소위 '오픈 워크비자'라고 불리는 이 파트너 워크비자는 뉴질랜드에서 워크비자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혹은 뉴질랜드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의 동거인이 신청하는 비자이다. 나는 마이클이 뉴질랜드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파트너 워크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는데 신청비용만 거의 한화로 약 230만 원이 들었고 결격사유나 신청서가 거절될 사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이번에는 따로 변호사나 상담사를 붙이지 않고 내 힘으로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영주권자인 사람으로부터 받는 파트너 워크비자는 신청조건만 맞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데, 파트너가 서로 함께 산지 1년 이상이 되어야 하고 서로 같이 살고 있었다는 것들을 증명할 주소지와 서로의 이름이 적힌 우편, 공동 은행 계좌 내역, 공동 집 렌트비 지출자료 그리고 수많은 사진과 여행 내역등이 필요하다. 신청 후 약 4개월 후 드디어 파트너 워크비자 승인이 났고 그렇게 나는 제약회사에 더 이상 묵여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동거인이 서로 1년 이상 같이 살았으면 파트너 워크비자는 1년짜리가, 2년 이상 같이 산 경우에는 2년짜리가 승인된다. 몇 개월 동안 제약회사에서 받은 워크비자로 손발이 묶여있어서 수입이 거의 없었기에 나는 파트너 워크비자가 승인된 날 직후부터 다시 쉬는 날 없이 일하는 일꾼 모드로 돌아갔다. 초밥가게를 다시 출근하고, 집 근처 실내 암벽 등반 센터와, 여기저기 호텔이나 이벤트, 행사장을 전전하며 당일 알바를 했다. 제약회사에서 워크비자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이제 제대로 된 직장다운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뼈를 묻겠구나 싶었지만 나는 다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픈 비자라서 일을 하는 장소나 시간 제약 없이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이제 서른 살이 넘은 내 나이에 아직까지 변변치 않은 직장 하나 없이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버티면서 지내던 중 2024년이 되면서 다행히 제약회사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제약회사에서 나를 풀타임으로 다시 고용해 주었다. 시급도 더 올라갔고 주 30시간을 다시 보장해 주시면서 나의 제대로 된 직장은 다시 제약회사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스트레스도 줄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
회사에서 받은 워크비자로 생명은 연장할 수 있었지만 끊임없이 회사 사정에 따라 내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언제든지 뉴질랜드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불안정한 수입으로 인해 워크비자를 받긴 했지만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 탄 백인 왕자를 만나서 파트너 워크비자를 받았다. 워킹홀리데이로 뉴질랜드에 와서, 비자 때문에 불안에 떨고 추방 위협을 받으며 살지 않아도 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앞으로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뉴질랜드와 나와의 인연이 아직 끊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확실한 또 한 가지는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평생 함께할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마이클은 뉴질랜드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 나라에 남을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현지인을 만나 파트너 비자를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비자를 받지 못했더라도 이 남자가 살고 있는 그 어디라도 함께 갈 의사가 있었다. 그게 안된다면 마이클을 한국으로 데려가서 한국 영주권을 줄 계획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우리의 운명은 뉴질랜드에서 잠시 더 머무르는 것인가 보다.
뉴질랜드에서 마이클과 함께하는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너무나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