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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내 집 마련

드디어 이 땅 위에 내 집이 생겼다

by 너나나나

뉴질랜드에 2018년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스무 살 때 했던 알바보다 훨씬 더 많은 알바들을 하면서 악착같이 일했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았지만 일주일에 절대적으로 일하는 양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월급만큼 받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 물가가 비쌌기 때문에 미용실은 사치라고 생각해서 혼자 미용가위로 머리를 잘랐고, 3,4벌의 옷을 돌려 입으면서 쇼핑과도 멀리하며 살았다. 외식비용이 너무 비싸서 가능하면 집에서 요리를 해 먹었고 쉬는 날이 생기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하루 단기알바들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일을 했다. 이렇게 자린고비처럼 돈을 모아 3~4년간 한화로 약 6천만 원 정도를 모을 수 있었다.

파트너 마이클과 함께 살았던 오클랜드 렌트집은 장대처럼 내린 비 때문에 집 안에 물이 샜고 그 물은 방 안으로까지 들어와 카펫을 적시기 시작했다. 집주인에게 바로 알렸으나 집주인이 바로 집으로 와서 보지 않고 우리가 사용하던 세탁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시간이 지체됐다. 결국 환기되지 않던 그 방 벽면은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고 방 안에 들어가면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한 곰팡이 냄새 때문에 헛기침을 하기 일쑤여서 그 방에 지내다가는 없던 병까지 얻을 것만 같았다. 며칠 뒤, 인부들이 와서 방을 보더니 대대적으로 공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고, 집주인은 마이클과 나에게 90일 안에 이사를 나가라고 통보하였다. 2년 동안 살았던 그 집에서 미운 정 고운 정들었지만 내심 한편으로는 그 집을 나오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사를 나가야 하는 것이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당장 이사 갈 렌트집이나 플렛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 단기에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일단은 마이클의 부모님 집에서 지내면서 새로운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이클의 부모님 집은 오클랜드 중심에서도 서쪽으로 30분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곳이라서 출퇴근 운전 거리가 늘어나긴 했지만 당장 지낼 곳이 필요했기에 부모님과의 동거는 필연적이었다.


2024년 7월, 곰팡이 집에서 이사를 나온 후 마이클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한 달 안에는 새로운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결국 세 달간 같이 살았다. 마이클 부모님이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어떻게 마이클 늦둥이 동생을 훈육하시는지 등을 볼 수 있어서 마이클이 자라온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마이클과 나는 원래 결혼이나 자녀계획에 대해서 둘 다 회의적인 입장이었는데 함께 살면서 생각이 바뀌어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부모님의 집에서 살다가 귀중한 생명을 얻었다. 마이클 부모님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주셨고 긴 대화 끝에, 렌트집이 아닌, 이 아이와 함께 살 진짜 우리 집을 찾기로 결정했다. 오클랜드는 집 값이 너무 비싸서 다른 도시에 눈길을 돌렸고 오클랜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토루아가 물망에 올랐다. 우리는 오클랜드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로토루아를 총 3번을 방문해서 간신히 좋은 집을 찾았고 임심을 한 동시에 도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만두고 로토루아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마이크는 집에서 일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우리 명의로 된 집에서 에어비앤비를 하면서 돈을 버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집을 사자고 마음먹은 후 막상 어떻게 하는 줄 몰라서 일단 우리가 얼마나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집 근처 은행을 예약도 없이 방문했다. 간단한 상담을 예상하고 갔는데 우리가 들어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직급이 좀 높아 보이는 남자 직원이 우리를 상담실로 안내했다. 그의 이름은 마단. 네팔사람인데 뉴질랜드에 오래전에 와서 살고 있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금반지와 멋진 시계를 장착한 마단은 40대 후반으로 보였고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것으로 보이는 듯한 전문적인 포스를 풍겼다. 마이클과 나의 작년 연봉, 현재 갖고 있는 재산, 재물 등을 토대로 얼마 정도의 대출이 나올 수 있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줬고 현재 금리가 어떻게 되는지, 얼마만큼의 돈을 대출하면 매주 이자를 포함하여 얼마씩 갚아야 하는지 등을 설명해 줬다. 마단은 자신은 그저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한 사람이지 브로커처럼 구매자가 집을 빨리 사도록 유도하며 수수료를 떼가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우리는 브로커의 존재조차 몰랐기에 마단의 그런 말은 그를 더욱 신뢰하게 만들었다. 상담 결과, 우리가 갖고 있는 돈과 대출금을 다 합치면 5억에서 최대 6억짜리 집을 살 수 있었다. 오클랜드였으면 최소 8억 이상은 있어야 집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오클랜드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지방에 집을 사는 게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더 가능한 이야기였다.


로토루아에서 이 가격대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괜찮은 집이 있는지 핸드폰 부동산 어플로 매일 검색했다. 집을 사려고 보러 다니는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어떤 집이 좋은 건지 전혀 몰랐기에 일단 사진상 예쁘고 깔끔해 보이는 집 몇 채를 선별했다. 부동산 직원에게 연락해서 주말에 3시간 운전을 해서 로토루아에 갈 건데 우리가 뽑아놓은 집들을 볼 수 있겠냐고 부탁했고 직원은 선뜻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집을 보러 간 첫 번째 방문날, 사진상으로는 분명히 다 좋아 보였는데 막상 가서 보니까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있었다. 집이 너무 오래되거나 동네 분위기가 안 좋거나 온전히 내 집이 아니라 집 지분의 일부분만 소유할 수 있거나 등등. 첫 번째 방문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렇게 두 달 동안 총 세 번의 방문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오래된 집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와 딱 봐도 허름하고 낡은 내외관에 지쳐있던 찰나, 마지막 집이라 생각하고 봤던 타운하우스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집 문을 열자마자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확신했다. 2024년에 새로 지어진 신축이었고 시내까지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안전한 지역이라서 딱 좋았다. 에어비앤비를 할 계획이었으므로 집이 깨끗하고 모던한 스타일의 이 집은 우리가 원하던 집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광고책자에 필기를 해 가면서 집을 둘러봤고 보면 볼수록 이전에 봤던 오래된 집들은 절대 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큰 수확을 건진 후 우리는 오클랜드로 다시 3시간 운전을 해서 올라왔고 집 사진을 마이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마이클 부모님은 부엌이랑 거실이 2층에 있고 방들이 1층에 있는 구조가 아쉽다고 하시면서 내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필요하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우리가 오클랜드에서 부모님과 가까이 살지 않고 멀어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셨다. 그래도 오클랜드에서 집을 살 형편은 되지 않고 오래된 집은 사고 싶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로토루아에 새로 지은 이 타운하우스에서 사는 게 제격이었다.

일단 집을 찾았으니 다음에 할 일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서류 작업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은행 직원 마담에게도 집을 찾았다고 알려주었고 마단과 변호사가 서로 협력해서 집을 사는 일련의 과정들을 밝아나갔다. 변호사를 통해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몇몇 서류들을 받았는데 이 집에 대한 상세 설계도, 집 자제들 관련 문서, 집에 하자는 없는지 건설 과정에서 제대로 집을 지은건 맞는지 등을 확인하는 문서, 시의회에서 제공하는 집 주변 토지상태 관련 문서, 홍수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문서 등이었다.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전문적인 내용이 담긴 자료들이라서 변호사가 먼저 문서들을 읽고 이해한 후 우리에게 중요한 것만 설명해 주었다. 변호사는 이 집을 지은 장소가 홍수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곳은 아니지만 홍수 위험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홍수가 크게 나면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집을 지은 지대 자체가 그렇게 단단한 지형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진이 나면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로토루아 도시 전역이 큰 호수를 안고 있기 때문에 지반이 약한 문제는 어디나 똑같다는 부연설명도 했다. 부동산과 건설사와도 이야기를 나눈 결과, 홍수나 지진의 위험 때문에 타운하우스 전반에 걸쳐 애초에 집의 토대를 짓기 전부터 지대를 다른 곳 보다 더 높게 만들었으며 자연재해에 대비하여 기준선에 부합하는 건설 자재들로 집을 튼튼하게 지었다고 했다. 걱정과 우려가 되긴 했으나 깊은 고심 끝에 이러한 위험이 아예 없으면서 이와 같은 가격의 집은 없을 거라는 판단하에 집보험을 끼고 집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최종 결정 후 은행 직원 마담에게 대출금 관련된 상담을 다시 한번 해야 했는데 이 상담에서 마단은 우리에게 원래 대출을 해 주겠다고 했던 금액보다 좀 더 적은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내가 오클랜드에 살았으면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수입이 있었을 텐데 로토루아로 가면서 무직상태가 되니까 수입이 없어 대출금을 갚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마이클만의 소득으로는 부족하기에 하숙생 2명을 구해서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더 큰 조건은 원래는 집 값의 20%만 선지불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제 내가 수입이 없을 거라고 말하니 그러면 25%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5%면 한화로 약 2천5백만 원 정도였는데 단기간에 이 큰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숙생을 구하는 일은 어떻게든 한다 쳐도 몇천만 원 되는 돈을 갑자기 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결국 집을 사려고 했던 그동안의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이클과 나는 서로의 부모님에게 SOS를 해보기로 했고 우리 엄마아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겨서 대출금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20번 넘게 했고 가능한 한 빨리 돈을 갚겠노라고 약속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숙생 2명은 서류상으로만 필요한 절차였기에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고 우리 부모님의 도움 덕분에 집 대출을 끝내 받을 수 있었다. 집값을 지불한 후 이사 갈 날짜를 확정 지었고 이사 가기 전, 외부 건설업체 사람을 고용해서 집에 하자가 없는지 수리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또한 이사 전에, 블라인드업체 사람과 연락하여 미리 집에 있는 모든 창문에 블라인드를 설치했고 큰 가구들을 미리 구입하여 이사 가는 날짜에 맞춰 배달될 수 있게 예약했다. 우리나라처럼 하이마트 같은 곳에서 한 번에 가전 가구들을 주문해서 배송해 주는 시스템이 아니었기에 우리가 일일이 여기저기서 하나하나 예약을 해야 했다. 바쁘게 이사준비를 하면서도 진짜 내가 내 집을 갖게 되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사 가는 날이 되어서야, 집 열쇠를 받아 들고 집 안에 들어가는 그 순간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게 앞으로 내가 살 나의 집이구나. 태어난 지 32년이 지나서 드디어 이 땅 위에 나의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이사 온 그날부터 나는 매일같이 집을 청소하고 닦고 쓸고 광을 냈다. 내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고 내가 사고 싶은 것들을 사서 집을 꾸밀 수 있었다. 사실은 그저 거실에 누워 맑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뉴질랜드 치안이나 의료서비스 등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커져가면서 빨리 비자를 받아서 이 나라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막상 내 집을 마련하고 보니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구나 싶은 생각으로 바뀌었다. 28살에 세계여행을 떠나면서 한국 마인드보다는 외국 생활을 하는 것이 더 편하고 나에게 잘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내가 평생 함께할 사람과 내 보금자리를 찾았고 내 아이도 갖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일만 남았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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