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디락스 Mar 22. 2022

아빠 백수되던 날

우리 동네 마을 입구에는 <대원동가든>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작은 슈퍼도 없고, 버스도 두 시간에 한 대 밖에 안 다니는 외진 마을에 유일한 음식점이었다. 나무가 많이 있고, 작은 정자가 있어서 꽤 운치 있는 식당이었다. 지나가다 보면 손님도 꽤 많았다. 투박하게 쓰인 <대원동 가든>이라는 간판 밑에는 ‘영양탕’이라고 적혀있었다. 메뉴는 단 하나 영양탕이었다. 자연 관찰 책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초원의 뿔이 달린 ‘영양’이 저 영양인 줄 알았다.


영양탕은 영양이 아니고 개고기로 만드는 것을 알 때쯤이었으니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기억한다. 그때 즈음부터 아빠와 나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되었다. 그날도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5번 버스를 타고 대원동 가든에 내렸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저기 아빠가 오고 있었다. 저기 아빠가 오는데 나는 숨어버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전봇대 뒤에 숨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몰래 아빠를 봤다. 얼른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를 바랬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아빠는 한참 보고 있는데 “아빠가 늙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도 조금 굽어있고, 머리도 희끗희끗했다. 아빠가 아니고 동네 아저씨 같았다. 다행히 아빠는 나를 보지 못했다. 오늘 저녁도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는지 대원동 가든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아빠가 회사에서 잘렸다.  엄마와 이모의 전화 통화를 엿들어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야기를 했다. 이모도 한숨을 쉬었다. 그즈음 이모부도 직장을 잃었다. 그리고 내 친구 지영이 아빠도 직장을 잃었고, 꽤 좋은 집에 살던 민이도 허름한 빌라로 이사를 했다. 아침이면 양복을 차려입고 출근하던 동네 아저씨도 해가 중천인데 추리닝을 입고 동네를 걸어 다녔다. IMF 외환위기였다.


부업이었던 농사가 주업이 되면서 아빠는 더 빨리 늙어갔다. 주말에 친척 결혼식이 있을 때나 아빠가 양복을 입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빠가 회사에 다닐 때는 주말에 밭일을 나갈 때 입는 허르스름한 갈옷이 어울리지 않았는데, 전업 농부가 되고 나니 갈옷이 맞춤옷처럼 어울렸다. 어느 샌가부터 양복을 입은 모습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엄마도 일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식당일 밖에 없었다. 엄마는 학교 급식실에서 일했다. 이모와 통화 할 때면 고등학교도 졸업시켜 주지 않은 할아버지를 자주 원망했다.


대원동 가든을 지나갈 때면 ‘대원동가든’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푹 곤 음식에 들깨와 깻잎을 가득 얹은 그 냄새가 난다. 언젠가부터 그 냄새가 슬프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양탕이 개고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 냄새가 슬프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고, 회사에 잘린 아빠가 대원동 가든에 들어가는 것을 봤을 때부터 같기도 하다.


아빠는 술을 진탕 마시고도 다음날이면 또 일어나서 일했다. 엄마도 매일 일했다. 우리 집 살림은 조금씩 좋아졌고, 지영이네 아빠도 다른 직장을 구했다. IMF라는 단어는 잊혀 갔고, 대원동 가든은 어느 날 문을 닫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