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디락스 Mar 22. 2022

아빠는 피구왕 통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연을 아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배경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점은 내가 아빠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빠의 사연을 모른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가 한 행동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


주말 아침이었다. 아빠는 나를 부르더니 컴퓨터 프린터기는 쓰려고 하면 고장이라고 틱틱거렸다. 고장이 나면 말을 해야 고치는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쓰려고 보면 또 고장이라고 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에도 아빠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말을 못 했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어릴 때는 아빠가 무서워서 말을 안 했고, 조금 크고 나니 아빠를 무시해서 말을 안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물론 엄마와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정자의 사연은 모두 알고 있었다. 엄마와 이모가 대화하는 것을 항상 엿들었기 때문이다.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자장면을 사주었다. 나는 자장면을 먹는 척하면서 이야기를 엿들었다. 서귀포 바다를 보면서 물질 나간 해녀 엄마를 기다리던 정자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가 물질해서 잡아 온 물고기를 할아버지가 먹고 큰 외삼촌들이 먹고 침만 꼴깍꼴깍 넘기던 정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술을 마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여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백마 탄 ’제주시 남자‘를 꿈꾸던 25살의 정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자를 조금 더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국민학교 시절 꿈나무 피구 선수였던 61년생 종덕은 국가대표 피구 선수가 되지 못한 꿈을 집에서 펼쳤다. 화가 나면 분을 참지 못하고 물건을 던졌다. 오징어젓갈이 담긴 유리 반찬통을 던졌다. 하얀 벽에는 빨간 자국이 남았고 며칠이 지나도 냄새가 났다. 아빠가 왜 오징어젓갈이 담긴 반찬통을 던졌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바닥을 닦던 엄마다.


아빠는 국가대표 피구 선수가 돼야 했었다. 꽤 실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화에 못 이겨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비싼 물건과 엄마에게는 물건을 던지지 않았다. 물건들은 아주 정확하게 엄마를 피해 갔다. 엄마에게 물건을 던지지 않는 것은 다행이기도 했고 불행이기도 했다. 자도 맞으면서까지 결혼생활을 이어갈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물건을 던질 때면 엄마를 피해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크게 다치지 않을 물건이 하나만 엄마 몸에 맞았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구왕 통키는 정확했다. 모든 물건은 엄마를 피해 갔다. 그래서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도 깨진 유리병을 치우고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다음 날은 이모에게 전화했다.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는 없지만, 힌트가 될만한 단서들이 있다. 60살이 넘은 아빠가 90살이 다 되어 가는 할머니와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할머니와 배다른 형제 3명 사이에 아빠의 어린 시절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피구왕 통키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나이가 들어갔고 엄마는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힘이 약해졌고 엄마는 힘을 키운 것이다. 힘의 균형이 맞춰졌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고, 엄마는 돈까지 벌기 시작했다. 아빠는 물건을 던졌다가는 자신이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라는 것을 파악했다. 아니다, 낙동강 메추리알도 안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피구왕 통키는 이렇게 비참하게 은퇴했다. 그 후로 아빠가 물건을 던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은퇴한 피구왕은 술을 더 마셨다. 그리고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피웠다.


나는 글을 쓰며 상처를 떼어낸다.

엄마는 이모와 통화하며 상처를 토해낸다.

아빠는 술로 상처를 씻어낸다. 담배를 피우며 상처를 태운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모습이 보기 싫다.

그의 사연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전 02화 엄마의 춤바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