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디락스 Oct 14. 2022

나 친자식 맞아?


설, 추석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친정에 안 간 지 2년이 넘었다.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안 갔다. 둘째가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아이가 좀 커서 가만히 품에 안겨 있지 않는다고 안 갔다. 둘째가 두 돌을 넘겼을 때는 코로나가 유행했다. 둘째가 아직 마스크가 답답해서, 공항을 지나서 제주도까지 가기는 무리일 것 같다는 핑계가 있었다.


이제 코로나는 국민 감기가 되어버렸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우리 가족 모두 불과 보름 전에 코로나에 걸렸다. 슈퍼 초강력 백신을 맞은 셈이다. 올해 추석을 꼼짝없이 제주도 친정에 가야 하게 생겼다.


“엄마, 다음 주에 제주도 가맨, 수요일에 친정 들렀다가 시댁에 갈게.”

“응, 겅허라. 집으로 오지 말고, 식당에서 밥 먹고 가게.”

(응, 그렇게 하렴, 집으로 오지 말고, 식당에서 밥 먹고 가자)


어쩜 저렇게도 정이 없을까. 일단 “응 겅허라.”부터 빈정이 상한다. 2년 만에 딸과 유일한 손자 둘을 만나는데 어쩜 저럴까 싶다. 내가 원하는 엄마의 반응은 이런 것이다. “우리 딸이랑, 손자들이랑 올해는 볼 수 있겠네~~”이렇게 말하며 팔짝팔짝 뛰었으면 좋겠다. 한술 더 떠서 “우리 애들 볼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구나” 정도로 오바했으면 좋겠다. 전화를 끊자마자 너무 행복해서 마트에 갔으면 좋겠다. 마트에서 전복이랑, 한우도 잔뜩 사고,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부두에 가서 방금 잡아 온 싱싱한 갈치랑 한치도 잔뜩 사 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도착하기 하루 전부터 갈비탕을 끓이고, 우리가 가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진수성찬을 차려야 된다. 물론 장을 보고, 요리하는 내내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요리해야 된다.


누가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했는가. 나의 엄마 정자 여사에게는 사위고 뭐고 없다. 둘째 아이가 어릴 때 나와 둘째 아이는 집에 있고, 남편과 첫째 아이만 제주도에 인사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엄마는 동네 식당에서 돈가스를 사줬다.


“강서방 돈가스 맛 좋다고 잘 먹어라. 여러 가지 차려놔봤자 다 먹지도 않고 음식물 쓰레기만 된다게.”


우리 집에 윤석열 대통령이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다고 해도 이렇게 말할 사람이다.


“평일 9시부터 6시까지는 출근하고예, 월, 수, 금 저녁 7시부터 8시까지는 요가 수업이 이서부난 그 시간은 피해서 옵써.”

(평일 9-6시는 출근해요. 월수금 저녁 7시부터 8시까지는 요가 수업이 있어서 그 시간은 피해서 오세요)


정이 없다. 게다가 저 당당한 태도도 싫다. 우리 엄마는 조선 시대 후기 정약용도 울고갈 실용주의자다. 음식을 차려봤자 남기기만 하고, 게다가 먹는 음식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거다. 맛있는 음식을 나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만들어서, 치울 필요도 없는데 왜 식당에 가지 않는지 나에게 묻는다. 더는 말 하기 싫다. 저 말투도 싫다. 무엇보다 이런 엄마의 모습에서 나의 고치고 싶은 단점을 그대로 보는 게 지옥이다. 사실은 엄마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엄마는 효율적인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 고치고 싶은 단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쩌면 잘되었다 싶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오가는 말들이 많아지면 항상 앙금을 남기는 우리 가족. 그냥 식당에서 얼른 밥 먹고 헤어지는 게 나은 걸지도 모른다.그날 오후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부모한테 사랑을 주러 온 자식이 있고, 사랑받으러 온 자식이 있데.”


내 마음속에 뚱해 있던 작은 아이가 힐끔 전화 소리를 엿듣는다. ‘사랑을 주기위해 온 자식’이란 말이 산스크리트어처럼, 아랍어처럼,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부모는 자식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주기만 하고, 자식은 받기만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부모 자식은 그래야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네 성당을 지날 때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꽃처럼 웃고있는 성모마리아 상의 미소가 보인다. 어린 예수가 흰 벽에 알록달록 크레용으로 낙서를 마구 해도, 침대 매트리스에 요거트를 쏟아도 웃을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저 성모마리아같은 엄마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전화를 끊고 친정집 근처 정관장에 전화해서 '홍삼정 추석 선물 세트'를 주문했다.


“엄마 큰길 사거리에 정관장에 홍삼 주문해 놨으니까 김정자 이름으로 찾아가”


내가 선물을 해주면 엄마가 넙죽 잘 받기라고 했으면 좋겠다. 넙죽넙죽 잘 받으면서, "뭐좀 더 살달라고, 이것도 사주고 저것도 사주라고"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럼 엄마를 마구 미워 할 수 있으니까.

자식에게 주지는 않고 받기만하는 엄마는 당연히 미워해도 되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뭘 사주면 엄마는 잘 받지를 못한다.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 자꾸만 요즘 너 일하느냐니, 왜 또 돈을 썼냐느니, 이거 얼마냐느니, 왜 이렇게 비싼 거로 샀느냐느니, 괜히 자꾸 묻는다. 엄마는 사랑을 주는데도, 받는데도 익숙하지 않다.


서귀포 어촌마을 가난한 집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서, 해녀인 엄마가 생선을 잡아 오면 오빠들이 줄줄이 먹고 침만 꼴깍 삼키던 엄마를 또 상상해 버렸다.

내일 오후 2시 비행기로 제주도에 간다.

수행길에 오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멘-

이전 12화 아빠가 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