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디락스 Oct 14. 2022

아빠가 운다


“상복 옷고름 매는 방법”


아빠가 핸드폰에 상여복의 옷고름을 오른쪽으로 메는 건지 왼쪽으로 메는 건지 검색하고 있었다. 아빠도 상주가 된 건 처음이다.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삼베로 된 노란 모자를 쓰고, 상복을 입고 옷고름을 오른쪽으로 메는지 왼쪽으로 메는지 몰라 네이버 검색을 하고 있다.


아빠가 상주가 되는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냥 내가 느끼기에 우리 아빠는 부모상을 10번쯤을 당해 봤을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 슬프지만 절제된 모습으로 척척 손님을 받고, 상을 치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도 헤매고 있다. 마치 내가 처음 부동산 집을 살 때, 유튜브에서 ‘부동산에서 호갱되지 않는 방법’을 검색하는 것처럼 아빠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하나 물어보고, 배워가며 상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지공원에 할머니를 모셨다. 제주도의 장례 풍습인지, 아니면 원래 화장터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할머니 관이 화장터에 들어갈 때 모두가 큰 소리로“불났어요. 빨리 나오세요!!!” 라고 외치라고 했다.아빠도 상주가 처음이고, 나도 할머니를 보내는 게 처음이어서 뭘 잘 모른다. 그냥 옆에서 시키는 대로 할머니 불났어요!! 나오세요!! 하고 외쳤다.


어제 하루 손님을 받는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아빠가 훌쩍훌쩍 운다. 나는 한 눈으로는 할머니를 보고 한 눈으로는 아빠의 뒷모습을 봤다. 엄마를 보내면서 울고 있는 영락없는 아들이었다. 큰 소리로 부르면 진짜로 엄마가 돌아온다고 믿는 어린아이처럼 아빠는 큰 소리고 할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불나수다, 얼른 나옵써”

“어머니 불나수다 얼른 나옵써”


관에 누운 할머니는 우는 아들을 달래주지 못했고, 아빠를 달래주는 건 엄마였다. 우리 엄마도 시어머니 상을 당한 건 처음이었지만 마치 15번쯤 시할머니를 보내본 것 같았다. 내가 5살 때까지 세상에 전부라고 믿었던,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 엄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들고 제일 앞에 서 있는 것도 엄마였고, 손님들을 받고, 손님들이 식사하고 계시면 모자란 반찬을 가져다주는 것도 엄마였고, 자기 친구들을 불러 앉혀서 커피를 타고 음식을 나눠주는 것도 모두 엄마였다. 무엇보다 아빠를 달래는 것도 엄마였다


나는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깬 것처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나는 엄마 아빠가 미친 듯이 싸울 때마다 “제발 두 사람이 이혼하고 각자 살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조금 더 커서는 “엄마 이렇게 싸울 거면 그냥 따로 살아”라고 엄마를 면박을 주듯 말을 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거나, 엄마가 내 말을 듣고 그냥 이혼해 버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정사진은 작은 엄마가 들 수도 있고, 식사하다가 모자란 반찬을 가져다주는 일은 도우미 이모를 모시면 되고, 커피 타는 일이나 빵을 나눠주는 일은 대신 해줄 사람이 있지만, 아빠를 달래는 일은 엄마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아빠는 결국 울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래 아이들도 달래줄 사람이 있을 때 울기 때문이다.


90세가 된 할머니가 영면하셨다. 정신은 맑으시지만, 허리를 심하게 다쳐 움직일 수 없게 돼서 오랜 시간을 요양원에서 보냈다. 할머니가 허리를 바짝 세우고 튼튼한 두 다리로 걸으며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절을 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양지공원을 나오는데 아빠가 자꾸만 내 주변을 왔다 갔다 거렸다. 나는 오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말을 할 거면 빨리 좀 하지 왔다 갔다 맴돌기만 한다.기껏 나한테 와서 한다는 말이 이거다.


“가라”


아빠와 나는 원래 고맙다느니, 고생했다느니 뭐 이런 말을 하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나도 “응”하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뒤돌아서서 아빠를 불렀다.


“아빠 할머니가 있으니까 우리 삼 남매 낳을 수 있는 거잖아. 할머니 고마운 마음으로 잘 보내드려.”


아빠는 눈이 시뻘게 져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들어갔다. 우리는 원래 두 마디 이상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좋은 곳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15년 동안이나 살았던 요양원을 나와서 걷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조금 위안이 된다.


이전 11화 로보카 폴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