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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골디락스 Mar 22. 2022

로보카 폴리

대한민국의 기혼 여성들은 설날과 추석이 다가오면 신경이 예민해진다. 먼저 이번 설에 시댁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대립이 시작된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는 만 명이 넘어갔다. 며느리들에게 이번 설 연휴를 집에서만 보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어른들의 애절한 바램도 이해된다. 코로나를 핑계로 아들딸들은 오지 않았고, 이미 두 번의 설을 쓸쓸히 보냈다. 이러다가 내가 죽어야 만나겠다는 주장도 꽤 설득력이 있다. 시댁에 가기로 했다면 친정을 언제 갈 것인가도 정해야 한다. 설날 당일 바로 갈 것인지 설날 하루를 시댁에서 자고 갈 것인지도 중요하다.


결혼 7년 차 대한민국 며느리인 나 역시 설이 다가오면 신경이 예민해진다. 다만 고민이 조금 다르다. 어떻게 하면 친정에서 빨리 빠져나올지가 가장 중요하다. 머리를 잘 굴려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경기도다. 친정은 제주시, 시댁은 서귀포다. 친정에서 시댁까지는 차로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생각해낸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비행기를 타고 제주시 공항에 내린다. 시댁 차가 9인승임을 내세워 시아버지에게 공항에 나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친정집을 지나치고 시댁으로 도망친다. 그다음이 더 스릴있다. 어머님에게 아이 둘을 맡기고 나는 혼자 제주시로 버스를 타고 온다. 친구를 만나고, 친언니를 만나고, 고기국수를 먹고 다시 조용히 시댁으로 돌아온다. 시댁 안마의자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잠이 든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 친정에 잠깐 들려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냅다 튀어간다. 비행기표는 3시쯤으로 예약해 둔다. 12시부터 1시까지 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2시까지 공항에 도착하면 된다. 완벽하다


나의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은 아빠 때문이다. 아빠가 공항에 나오겠다는 거다. 아빠가 사위에게 전화해서 앞으로 자기가 공항에 나오겠다고 통보했다. 아빠가 운전해서 서귀포 시댁까지 태워주겠다는 거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었다. 우리 아빠 차에 동네 친구를 태우고 학교에 가기로 약속 한 날이었다. 친구가 시간에 늦었고, 아빠는 친구가 있는 앞에서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친구는 무안해했고, 나는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공항에 2시 도착 예정이면 아빠는 1시부터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몇 시간이 늦어져도 아빠는 이제 화를 내지 않는다. 전세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늦는다고 성질을 박박 내면 오지 말라고 하면 그만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2번 게이트에 서 있으면 공항 주차장에서 30분전부터 기다리던 아빠 차가 달려온다.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고 짐을 싣는다. 그리고 아빠는 이빨을 54개쯤 드러내며 하나밖에 없는 손자인 범준이를 안는다. 차 뒷좌석에는 로보카 폴리 장난감이 있다. 아빠는 앞을 보지 않고 백미러를 보며 운전을 한다. 백미러에 비친 손자를 보면서 운전한다. 차가 자꾸 중앙선을 밟아서 불안하다. 차에서 나는 아빠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아빠랑 말하기가 싫은 것이 아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서로 마음은 상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시댁에 도착하면 아빠는 얼른 짐을 내려주고 범준이를 한 번 더 안아본다. 나는 작은 소리로 “조심히 가….”하고 말한다. 아빠는 얼른 시동을 켜고 떠난다. 아빠의 뒷모습이 낯이 익다. 회사에 잘리고 <대원동가든>에 들어가던 그 뒷모습이다. 머리가 희고 등이 굽었다.


시어머니는 사돈어른이 오신다고 집에서 제일 좋은 꽃이 그려진 찻잔에 커피를 타고 계신다. 사돈어른을 그냥 보냈다며 나를 나무라신다. 이럴 때는 범준아~~하고 부르면 된다. 범준이가 있어서 참 좋다. 어머님은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보면 울면서 웃는다.


나는 시댁 거실 소파에 누워 혼자 한라산을 넘고 있을 아빠를 잠깐 생각한다. 뒷좌석에 로보카 폴리도 없이 혼자 산을 넘어야 한다. 소파는 편하고 옥돔 굽는 냄새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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