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할 수 없어 '흥분'이라 불릴 뿐이지

생체실험 : 단식(5)

by 손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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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m종국은 결코 깐깐하지 않다

첫 단식, 38시간 30분

배고픔은 파도처럼 몰려오지만 이내 사라지는 것

온 몸의 세포를 감각하다





주체할 수 없어 ‘흥분’이라 불리울 뿐이지



“손 검진자님, 여기 신발 벗고 올라가세요.”



몸무게 50.5kg이 찍혔다. 옷 무게 포함 여부는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줄어든 것만은 확실했다. 운동복 착용 기준 평소 50.8kg 정도를 유지하고 지내서다. 옷 무게를 빼도 무게가 떨어져 나갔고, 옷 무게를 포함해도 떨어져 나간 수치였다. 한 끼 식사에 도로 올라갈 숫자였지만 어쨌거나 눈에 보이는 결과였다.



검진 끝나는 즉시 마시려 텀블러에 두유와 쑥 가루, 약간의 설탕을 넣은 일명 ‘두유 쑥 라떼’를 타갔더랬다. 장시간 단식 후 첫 식사로, 위가 놀라지 않을 부드럽고 가벼운 것을 권한다. 죽도 좋고 차가 아닌 다른 음료도 좋다. 일종의 위 운동의 포문을 여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첫 섭취 뒤, 30분 지나 본식 할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일 줄은 몰랐다. 공장식 건강검진은 스피드의 끝을 달렸다. 그날 나는, 고유명사인 내 이름 석자가 아니라 내게 부여된 번호로 불리우며, 층을 오가며 신속하게 검진을 받아냈다. 아주 빨랐고 아주 인간답지 못한 취급이었다. 가장 피하고 싶던 자궁경부암 검사마저 수치를 감각 할 겨를 없이 끝났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검진센터에 오고 약 2시간이 흘렀다. 치과 검진을 마지막으로 검진표 체크란이 모두 v로 채워졌다. 치과실 근처에 있던 직원이 탈의실에 가 옷 갈아입고 나오란다. 이는 즉, 단식 종료에 임박했음을 알리는 음성과도 같았다. 살며 가끔, 그토록 고대했던 일이 곧 내게 벌어질 거라는, 상상에서 현실에 가까워졌음을 인식할 때면 강렬한 시각화가 이루어진다. 저 멀리 희미하게 내가 보인다.



나는 38.5km라는 중장거리 마라토너(였)다. 10km까진 껌이었는데 뛰는 중간 중간 고비를 만나는 바람에 온갖 잡생각과 함께 포기와 안 포기를 간본다. ㅅㅂ해, 말아. 그냥 가, 말아! 그 사이 36km를 달려왔고 어쩌다 보니 선 하나를 보게 된다. 피니시라인이다. 저 멀리 아치형으로 생긴 조형물과 그 아래 좌에서 우로 주욱 연결된 줄 하나가 웅장함으로 나를 기다린다. 저것이 정녕 끝을 알리는 지점이던가! 저 선을 지나면 끝이겠네. 먹을 수 있겠네. 먹긴 먹네. 마치 지니가 연기 속에 미래를 영사하듯 피니시라인을 통과한 내 모습이 비추어진다. 그와 동시에 여기 올 때 입고 있던 청바지에 맨투맨으로 갈아입고, 나는 카누에서 사은품으로 받았던 텀블러 뚜껑을 연다. 투명한 맛이라 배를 채울 수 없던 커피는 없고 대신 두유 쑥 라떼가 찰방찰방 담겨있다. 너로구나. 보고 싶었어. 짧은 인사 뒤 거기 담겨 있던 쑥 라떼를 꼴깍꼴깍 마신다, 음식이 들이찬다, 제약이 사라진다. 시원한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위로 퍼진다. 우롱차나 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던 묵직함이 칼로리가 되어 몸에 번진다. 번진다.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 비슷한 게.



완벽한 시각화였을까. 상상을 마친 순간, 일순 몸에 무언가 들어왔다 나간 기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나 봤듯 외계 물질이 인간 몸에 들어찬 것 같았고, 체감으로 말하자면 손끝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에너지가 나를 거세게 휘감았다고 할 수 있었다. 몰아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핑.



호르몬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 것을 혈액이 몸을 감도는 속도로 알았다. 이게 뭐지. 혈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더니 어지러워 식은땀이 나려 한다. 구역질이 날 것도 같다. 무사히 단식을 마치겠다는, 정화되겠다는 고매한 나의 정신은 불과 5초 전과 같은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희극인 김구라랑 김신영이 말하던 공황장애가 이런 느낌일까. 거인 다섯 명이 심장 위에서 뛰노는 것처럼 쿵쾅쿵쾅하더니 손이 차갑다.



몸의 주인조차 알아챌 법한 거센 이상기류는 덜컥 겁에 들게 한다. 몹시 많고 다양한 나쁜 생각을 지구 끝까지 하게 되니까. 보통은 안 좋게 끝나고, 그래서인지 벼랑 끝에 서 있던 나는 내가 만든 공상 때문에 스스로 밀어 떨어질 때가 많다. 그리고 나 또한 밀려 떨어질 뻔했다. 이거 뭐지. 배고파 뒤지는 것 아닌가에서 ‘뒤지는’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것인가. 검진 센터에서 쓰러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



그러다 불현듯 상상과 공상의 합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야 놀란 가슴이 이성을 찾아 식은땀과 구역질을 거두어 갔다. 고작 ‘첫 모금’ 상상에 정신이 혼미했다는 것을. 그것 밖엔 아무런 외부 자극도 변화도 없었다는 것을. 너무나 평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더는 상상하지 말아야겠다. 소환한 지니를 램프로 돌려보내듯 첫 음료를 마시는 ‘나’ 상상하기를 멈추자 서서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38시간 30분만에 첫 음식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