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파괴된 가설 그것은 하나의 은유

생체실험 : 단식(10)

by 손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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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m종국은 결코 깐깐하지 않다

첫 단식, 38시간 30분

배고픔은 파도처럼 몰려오지만 이내 사라지는 것

온 몸의 세포를 감각하다

주체할 수 없어 '흥분'이라 불릴 뿐이지

단식을 통해 가설을 바꿔보고 싶었다

38시간 단식을 가능하게 한 것들

단식기간 중 김밥?

다소, 위장병





단식은 그저 보여진 실천에 불과하지



1) 편견이 깨짐, 가설이 바뀐 것이다

고파하는 배를 먹음으로 달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 아닐까, 생에 치명타를 입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 누워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가설들이 깨졌다.

그리고 이것은 달라질 내 삶에 많은 부분을 은유한다.



2) 정화의 증거1 : 피부가 깰끔해짐

여드름, 특히 오른뺨에 북두칠성 같은 벌건 뾰루지가 있었다. 두더지 게임처럼 났다 들어갔다 하며 아름답고 싶은 내 심기를 공연히 불편하게 했더랬다. 통화를 많이 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 한 통도 하지 않을 때가 숱한 날을 이룬다.


그러던 날, 단식 38시간 30분 뒤 벌겋게 그리고 기분 나쁘게 삐져나와 있던 여드름이 수욱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요철 같던 모공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모공은 여성에게 있어 악의 축 같은 존재다. 피부 결을 망쳐서이다. 별 짓을 다해도 모공만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어허이. 단식이 이정도 효과인가. 눈에 띄게 모공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피부가 깰끔해졌다.



3) 정화의 증거2: 잔털이 솟아남

정말 우연히 긴 파자마에 감춰있던 다리를 보게 되었다. 아주 우연한, 실은 아무 이유 없던. 그런데 웬걸, 군데군데 솜털 같은 잔털이 자랐다. 이런 다리털은 실로 오랜만이다. 하도 제모를 하다 보니 남성 수염처럼 굵고 거친 털만 듬성듬성 뾰족하게 올라왔기 때문이다. 몇 가닥 뽑으면 곧장 사라질 것들.


이번에 만난 털들은 어쩐지 보송보송했다. 어린새싹처럼도 보였달까. 다소 징그러운 이야기지만 인체의 신비전을 본 듯한 당시 놀람을 전하기 위해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시화 할 수 있는 변화는 이정도이다.



4) 미친 생산성

앞서 이야기 했으므로 이번 장에선 생략한다.





이런 분들께 단식을 추천합니다



빤한 대상, 그러니까 몸의 정화가 필요하거나, 다급히 잔털을 원하게 되었다거나 그런 재생력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하지는 않겠다. 그들은 추천대상이 아니라 참여대상이다. 그래서 내가 추천하고 싶은 이들은 따로 있다.



우선 현대 풍요 사회에서 굶어 쓰러지기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단식했다간 곧 쓰러지고 말 거라는 모종의 편견 혹은 ‘거야거야’ 앓이 중인 이들이다. 비건이 되고 그래서 고기 없이 사는 건 어떠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런 소감을 말한 적 있다. 사람들은 그른 통념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은 결코 깨져선 안 되는 것이라 단정 지은 채 지내는 듯합니다. 고기 안 먹으면 단백질 섭취는 어디서, ‘힘 내세요’ 할 때 ‘내세요’는 어떻게, 고기랑 생선 골고루 먹어야 영양 불균형이 생기지 않지. 야채와 과일 통곡물만으로 충분히 건강할 수 있음을 두꺼운 목소리로 이야기해줘도 믿으려 하지 않았지요.



단식도 마찬가지였다.

단식엔 정화라는 이점이 있다. 우리 몸은 소화해내느라 피곤하다. 현대 풍요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배고프다고, 심심하다고, 탐이 난다고 줄곧 먹게 하기 때문이다. 몸이 공장이라면 24시간 풀 가동 중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운 가설, 즉 배고프다는 몸의 신호에 곧장 먹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커다란 재앙이 내 몸에 닥쳐올 거야. 하는 것은 그저 편견에 불과하고, 그런 까닭에 몸이 회복할 시간을 스스로 막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편견은 쉽게 깨진다. 그때 자신이 구축한 세계의 가설은 파괴되고 우리는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단식은 그런 파괴적 체험 중 하나였다.



또한 시간이 더디게 흘러감을 몸소 체험하고 싶은 분들께 단식을 추천한다. 이번 단식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바지만 인간은 무료함을 먹음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입이 심심하다며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먹거나, 초코 볼을 입에 넣는 행위는 보통 무료함의 결과다. 안 먹고 지내보니 하루가 유독 길다. 먹으며 허비했던 공백이 먹지 않음으로 고스란히 공백으로 남아 그럴 테다. 예전에 지인이 술을 안 마시니 시간이 많아지더라며 너털웃음 지었었는데, 다시 만나면 이야기 해줄 수 있겠다. 특정 시간 먹지 말아보라고. 시간이 모짜렐라 치즈처럼 늘어나다 못해 지구를 두 바퀴 감싸고 올 거라고.





앞으로 단식 계획



애초에 일일 기록이면서 ‘생활’이라고 붙인 이유는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할수록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붙고도 있고 실제 살아 있는 몸의 변화를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인 나는 움직임이 매우 적었음에도 너무나 많이 먹으며 살아왔다. 문득문득 주인 잘못 만난 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단식으로 파괴된 하나의 가설, 그로 인해 나는 거창한 혁명을 했다. 이것은 내 삶의 상당한 부분을 은유하고 있다. 그동안 지레짐작, ‘그럴 것’이라며 잘못 취급해 온 가설이 있다면 이젠 전부 다 뜯어 볼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단식은 정말이지 드러난 하나의 실천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건이 되고 쓴 책 ⟪나의 비건 분투기⟫와 이번 단식을 계기로 쓰고 있는 이 글 ⟪단식, 파괴된 가설 그것은 하나의 은유⟫로 어렴풋 ‘실천주의적 작가’가 되어간다. 실천 뒤 쓰는 일. 반가운 습관이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