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키우는 아픔에 대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이든 마음이든 통증을 겪게 된단다. 그럴 때 이 말을 기억해 주렴. 통증은 때로 우리를 넘어뜨리지만, 또 어떤 통증은 우리를 키운단다. 그 통증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아픔을 잘 통과한 거야.
통증은 단순히 ‘아픈 증상’이 아니라 ‘통과하는 증상’이란다.
통증은 너를 통과하면서 ‘너라는 하나의 통’을 만드는 증거인 것이지.
통증은 정신, 감정, 신체를 연결하는 감각의 통로야.
정신적 통증은 신체적 통증을 견인하고, 이는 때로 존재 전체를 울리는 신호가 된단다.
통증은 무의식적인 인식, 혹은 허상일지도 모를 내면의 믿음이 표면으로 드러난 형태이기도 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골치 아파 죽겠다”라는 표현은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니 아픈 증상의 순간을 ‘통로’로 보고, 그 ‘통로’를 지나 한 개인으로서의 통합된 나, 즉 ‘통’이 되어야 해. 이것은 생명과 성장의 증거이자 삶의 증명이 되어 준단다.
너는 통증이 너를 통과하여 너를 키우게 하고 싶니?
아니면 네가 통증을 통과하지 못해 끌려다니고 잠식당한 채 나약한 심신으로 살고 싶니?
아이야, 엄마는 당부하고 싶어.
질병은 한 인간의 의식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상태야. 이렇게 내면의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몸을 통해 통증으로 나타나지. 그러니 통증은 신호이자 정보 제공자란다. (주1)
그러니 너는 네 몸이 보내는 '신호와 정보'를 잘 해석하여야 해.
통증들은 실제로 어디가 온전하지 못한 지를 알려주고, 우리가 주의 깊게 보완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줌으로써, 그러한 증상들이 더 이상 나타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기회를 준다.
체험을 통한 인식 과정과 깨달음을 통해서!(주2)
엄마 얘기를 다시 해줄게.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엄마는 주사를 맞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신체적 통증은 그다지 두렵지 않아.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아픔이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아. 내 몸이 아프면, 또는 아플 것 같으면 내 인식이 ‘BRAKE’를 걸며 나에게 신호를 보내오고, 그러면 내 일상은 ‘All STOP’이 되어버리지.
엄마 머릿속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는 고정관념이 있어.
“나는 몸이 약하니까 뭘 하고 나면 반드시 아프다. 큰 일을 앞두고는 부담감과 두려움으로 병이 난다.”
이런 생각은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며 정신을 잠식하고, 마치 나를 가스라이팅하는 것처럼 느껴져.
당장 쉬거나 하려던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더 크게 아플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단다.
어느 순간, 반복적인 신체의 ‘브레이크’는 무의식의 신념에 종속되어 내 인생의 패턴이 되어버렸단다. 엄마는 더 이상 이 반복적인 통증의 패턴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어. 그 사슬을 끊기로 결심했단다. 엄마 자신을 위해서도, 너희를 위해서도 말이야.
패턴을 자각하고, 그 신호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은 시작된다고 믿었어. 그러니 통증은 멈춤이 아니라 체(體)를 흔드는 채(篩), 즉 나를 더 정제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한 기회야.
내 몸을 진동시켜 나를 흔들고, 더 잘 쓰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지.
불평이나 불만으로만 보지 않고 변화의 성숙을 위한 ‘걸러짐’으로 해석한다면 어때?
너도 통증을 잘 맞이할 수 있겠지?
너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들 중에는 육신의 정념(情念)들을 불러일으켜서 너를 조종하여 꼭두각시로 부리는 부분보다 더 선하고 강하며 신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으라. 지금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려움인가? 의심인가? 욕망인가? 아니면 그런 종류의 어떤 것인가?(주3)
아이야,
케케묵은 인식의 종, 무의식의 꼭두각시가 되어 고정관념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삶은 살아선 안 되겠지? 네게는 너의 판단을 주관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어.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이상의 약점이나 통증을 겪고 있단다.
누구는 체력이 약하고, 누구는 만성 질환을 가지고 있어. 누구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기도 하고, 누구는 극심한 알레르기에 시달리기도 한다. 눈에 들어간 작은 티클, 손 끝에 박힌 가시 하나에도 삶의 질은 떨어지고 고통스럽다. 나의 통증이 다른 이의 것보다 덜하거나 더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는 잘 해석하여 받아들이고 흘려보내 극복하고, 누구는 매번 좌절하고, 삶의 여정 속에서 주춤하거나, 되돌아가거나, 멈춰 선단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완전한 건강은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 탯줄을 자르는 순간부터 통증이 삶의 일부일 것이야. 네게 오는 통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너만의 패턴이 될 수도 너를 키우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렴. 그 패턴을 자각하고 해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단다.
감정의 통증도 자각하는 순간 사라지곤 하지. 자각은 곧 통증으로부터 해방의 시작이란다.
혹시 인생에 통증의 총량이라는 게 있다면, 네가 지금 겪는 통증은 미래를 앞당겨 치르는 '성장통'일 수도 있단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너만 예외일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모든 것에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지. 결국, 네게 오는 모든 통증들은 너를 통과해 니 존재 자체가 ‘증명’이 되는 것. 통증은 아픔이 아닌 통로이자 증거라는 말 이해 하겠지?
그러니 이제 통증이 찾아온다면 적어도 ‘왜 아픈가, 왜 또 이러는가 괴롭다.’라는 생각보다
먼저 “이번에 내게 온 통증은 어떤 통로를 열어주려는 걸까?”
“나는 또 어떤 방식으로 이 통을 만들어 나를 증명하면 될까?”
이렇게 신호를 읽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주1, 2) 뤼디거 달케, 토르발트 데트레프센, 몸은 알고 있다. (단, 필자는 증상을 통증으로 표기한다.)
(주3) 아우렐리우스, 명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