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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메시지가 담긴 용돈 봉투

by 지언 방혜린

"친아빠 맞아? 아빠가 너무 젊고 잘생기셨어!"


결혼식 때 아빠 손을 잡고 들어가는 버진 로드에서 사람들이 아빠가 너무 젊다며 친아빠 맞냐고 웅성거린다. 친정아빠의 외모에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가 밀리다니…….

그래도 기분이 많이 나쁘진 않았다.

아빠 나이 서른이 넘어 나를 첫딸로 얻었기에 그 당시로선 꽤나 늦은 편이었는데…….

풍채가 좋고 잘생긴 1946년생 우리 아빠는 80세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최강 동안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아빠는 항상 주변에 굴비다발 엮인 듯 사람들이 줄줄이 많았다.

매너도 좋고 유머러스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빠는 진정한 애주가로 흥이 많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요즘말로 핵인싸였다. 하여 언제나 아빠를 좋아하는 또는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여든이 다 되어도 호기심 가득 언제나 유쾌하신 울 아부지

한 번은 이른 새벽 출근하는 아빠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된 차의 문을 따고 카오디오를 훔쳐서 파는 좀도둑들을 잡기 도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동네나 지역사회에 많은 일에 솔선수범하는 우리 아빠의 한참 때는 가족보다는 주변인들로 항상 공사가 다망했다.

아빠가 나를 예뻐한 건 부족함이 없었지만 어쩐지 아빠의 지인들에게 아빠를 빼앗기고 나와 동생들 엄마는 뒷전인 것 같아 아빠에 대한 마음이 불만으로 가득 차올라있던 철없는 시절도 꽤나 오래 있었다.

그 때는 아빠의 말들 행동들 모든 것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늦은 시간까지 혼자 장사를 하던 엄마를 보며 사춘기 시절 더욱 아빠를 미워하기도 했다.

사춘기를 방패 삼아 아빠에게 엄마만 고생시킨다고 바락바락 대든 적도 있었다.

아빠가 이해 안 되고 서운하고 미웠다.

화가 난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빅스윙을 날려 나를 한 대 쥐어박으려는 손이 내 머리 위에 멈춰서 꿀밤 콩 한 대 때리고 마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마 멈추지 않은 속도와 세기로 한 대 맞았다면 나는 아마 내장파열 내지 뇌진탕쯤은 걸렸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모양만 아찔한 마음 약한 아빠의 솜방망이 손 방망이였다.


큰돈을 벌어 여유롭게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아빠는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아빠였다. 겉으로 보기에 낙천적인 성격과는 반대로 아이러니하게 예민하고 결벽증에 가깝게 청결을 중시하는 아빠는 우리 삼 남매 머리 자르는 날을 제일 좋아했다.

내가 머리를 자르고 오는 날이면 "아이고 우리 리니 개운하게 이발했네~"하고 박수를 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유는 딱 하나 한동안 방바닥에 긴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방바닥에 머리카락 떨어진 거 주우라는 소리가 젤 싫었는데 지금 나도 방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이 그냥 봐지지 않는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고 노는 거에는 영 소질이 없는 엄마와 아빠는 정말 로또가 맞는 듯하다.

영원히 맞을 수 없는. 대체 연애는 어떻게 해서 결혼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도 서로 의지하며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틀림없는 천생연분인가 보다.

마음이 여리고 인정이 많은 아빠는 모든 추억을 소중히 여긴다.

돌도 안 된 나를 뒷동산에 데리고 올라가 잔디 위에 앉혀놓고 잠깐 숨었다 까꿍 하면 까르르까르르 웃고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 나에게 무슨 영화 속 한 장면 회상하듯 한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50년 전 이야기를 내가 노오란색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노라며 입었던 옷가지(사진도 있음) 바로 어제 일인 양 잊을 만하면 이야기한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아빠 인생에 가장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 인 듯싶다.

그리고 '추억이 소중한 내가 아빠의 이런 점을 많이 닮았구나!' 새삼 더 느껴진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능을 준비하는 나를 위해 신문사설을 스크랩해 책상에 올려주던 꼼꼼한 아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야간자율학습 마치는 시간 밤 10시에 내가 좋아하는 카페라테를 사서 학교로 마중 오던 다정한 아빠였다.

용인에서 김포로 이사 와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친정집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아빠 엄마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

친정집에도 자주 가서 들여다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또 손맛 좋은 엄마의 반찬과 김치를 언제든 전화 한 통으로 주문하면 가져다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엄마가 또 이런저런 반찬을 해 놓고 연락이 와서 가지러 친정에 갔다.

아빠에게 인사를 하는데 순간 아빠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머리가 멍해졌다.

아빠의 얼굴이 이마에서 입술까지 세로로 긁혀서 흉이 나 있었다.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주말에 산에 갔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단다.

그대로 산에서 굴러 얼굴이 쓸리고 만 것이다.

얼굴만 다친 게 다행이었다고 할 만큼 정말 큰일 날 뻔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태산 같은 아빠가 한때는 미워 죽겠던 아빠가 정 많고 나에게는 한없이 잘해주던 아빠가 갑자기 한없이 작아 보이니 속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빠한테 조심 또 조심하라며 폭풍잔소리를 마치 랩을 하듯 쉬지 않고 쏟아내었다.

괜찮아 기계도 한 80년 쓰면 부품이 하나 둘 고장 나는데
사람 몸도 고장 나는 게 당연하지.
아빠 정도는 건강한 거야.
고향에 살아있는 친구 놈이 한 명도 없어.
먼 길 먼저 갔던지 노치원에 들어갔던지…….
내 마음은 아직도 2~30대 그대로인데
몸속에 스위치가 하나씩 둘씩 꺼지는 느낌이네!
받아들여야지~

나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 가늠조차 안 되는 그 마음과 말에 감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잡을 수 없는 시간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을 뿐!!

우리 아빠는 늙어가는 세월의 순리에 비켜 갈 거란 착각 아님 오만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아니면 내 가정과 새끼들이 더 소중해 아빠의 늙어 감은 눈감아 버리고 잠시 한편으로 밀어 두고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카톡 카톡카톡"

이른 새벽 카톡소리가 나를 깨운다.

아빠가 잠이 안 온다며 옛 추억을 뒤지다가

학창 시절 나의 상장들과 초등학교 졸업식 날 아빠랑 이순신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중학교 때 지리산으로 갔던 가족여행에서 찍은 내 독 사진,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 뒷동산 개나리꽃 앞에서 찍은 사진들을 산발적으로 보내온다.

'우리 딸 공부 잘했네, 열심히 도전했네…….' 그랬다.

쭈욱 열심히 했으면 좋았으련만 초중등 때까지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아빠한테는 50이 다 된 딸이 아직도 학창 시절 예쁜 딸로 보이나 보다.

'아빠 이제 자 안 자고 뭐 하셔?' 아빠는 잠이 안 온단다.

공황장애가 온 듯한 느낌이라고 한다.

그렇게 안 오는 잠을 끝끝내 청하지 못하고 밤새 추억 여행을 하고 동이틀때까지 기다리다 나에게 보내온 카톡이었을 게다.

아빠의 그 감정에 같이 빠져 버린다면 나는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심한 듯 '아빠 어여 주무셔 나도 자야 해!' 어떤 다른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살가운 딸은 못되었다.

저렇게 정 많은 아빠에게 궁짝을 잘 맞춰주는 딸이었음 아빠는 덜 무료하고 더 풍성한 삶이었을까?

매 순간이 살얼음 같았을 아빠가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서글프다.

"아빠는 연예인이 되었어야 해!"

가끔씩 나는 아빠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시니어모델을 해보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아빠는 허허 웃을 뿐 대꾸도 안 한다.

또 특유의 풍부한 감성과 정 많은 성격으로 추억들을 잘 녹여낸 글들을 써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아빠가 뭐든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찾았음 하는 바람에서 이다.

자꾸만 세월 속으로 작아져 가는 것만 같아 어느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나도 겁이 난다.

아빠가 고민 없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여생을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사실 방법은 잘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아빠는 우리에게 용돈을 줄 때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항상 흰 봉투에 정성가득 손 글씨로 축하, 응원, 격려 같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적어 용돈을 넣어 주셨다.

지금도 나의 생일날 메시지를 적은 용돈봉투에 돈을 넣어 주시는 아빠이다.

이제는 일종의 아빠의 의식 같은 느낌이다.

나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도 또 조카들에게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메시지가 적힌 용돈봉투를 주신다.

그렇게 받은 용돈봉투들이 쌓여 한 가득이다.

지금 이 순간도 아빠의 용돈봉투를 언젠가는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순간이 오겠지 생각하면 두렵고 무섭다.

아빠를 걱정하는 게 아니고 나를 걱정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싫어진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봐야겠다.

아빠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꼭 찾아 추억이 너무나 소중한 아빠와 나의 지금부터 쌓아질 앞으로의 추억들을 좀 더 꽉꽉 채워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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