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아침 공기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고 있다. 아침 마당을 거닐며 마지막 꽃을 피워 반기는 야생화들을 바라보며 만추를 즐겨본다. 바람이 차가워도 꽃을 피워내는 야생화들이 대견하다. 살짝 다가가니 꽃 내음 짙게 배어나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는 이 시간이 오늘도 즐겁다. 야생화 향기를 뒤로하고 밤새 마당에 떨어진 가을을 정리하기 위해 비질을 시작한다. 깔끔하게 쓸려있는 마당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초등학교 무렵인 듯하다. 우리 집 마당은 포장이 되지 않은 흙으로 된 마당이었다. 그 당시 마을은 대부분 포장하지 않은 흙마당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마당을 쓸어내는 것이었다. 깔끔하게 비질된 마당은 꼭 헝클어진 머릿결을 빗으로 빗은 듯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나는 거의 매일 마당을 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닥에 생기는 빗자루 흔적과 굵은 모래가 쓸려나가고 깔끔해지는 그 모습이 좋아서 먼지에도 불구하고 매일 비질을 멈추지 않았다.
깔끔한 마당을 좋아했던 나를 귀찮게 하는 게 있었다. 바로 마당 끝에 자라고 있는 커다란 가래나무가 그 주인공이었다. 여름이면 깻망아지라는 벌레가 나무에서 잎을 먹고 자라며 그 자리에서 볼일을 봐서 마당에 까만 깨를 뿌려놓은 듯 지저분하게 만들어 더 자주 쓸어야 했고, 때로는 깻망아지가 떨어져 기어 다니는 통에 기겁을 하기도 했다. 깻망아지를 잠깐 설명하자면, 기억 상으로는 한 10~15cm 정도 되는 초록색을 띄는 벌레가 머리 쪽에 뾰족한 뿔 모양을 하고서 건드리면 '쉭' '쉭' 소리를 냈다. 몸통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까만 점이 있었다. 굵기도 굵어 건드리기 조차 징그러울 정도로 흉측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져 쓸고 돌아서면 다시 떨어지는 무한 반복의 도돌이표처럼 마당을 쓸어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래나무의 가래 열매가 정말 맛있다는 것이었다. 호두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열리는 모양은 꼭 포도송이를 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을이면 가래를 따야 하는데 가래나무가 너무 굵고 높아 웬만큼 올라가서는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줍는 것인데,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굳이 따고 싶어 한다. 기다란 막대기도 웬만해서는 자라 가지 못하기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돌팔매질이다.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 가래 열매를 조준해서 던져 맞추는 재미도 쏠쏠했다. 날아간 돌에 정확히 맞으면 여러 개의 가래가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튀어 떨어졌다. 그때의 쾌감이라는 것은 꼭 볼링 스트라이크를 쳤을 때의 기분, 그 이상의 짜릿함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돌팔매질을 생각보다 잘했었다. 돌멩이 5번 정도 던지면 한 두 번은 맞추는 나름 실력(?)이 있는 투수였다. 매년 돌팔매질로 가래를 따먹다 보니 던지는 실력도 늘었는가 보다. 그 덕분에 나는 중학교에서 실시하는 체력검사에 던지기 최고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그려놓은 마지막 라인을 무시하고 70m를 훌쩍 넘겼기에 선생님은 "홈런"을 외치셨다. 던질 때 공이 손가락에서 살짝 미끄러져 잘못 던졌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당연히 얼마 못 날아갔을 것이고, 파울이다 생각했었다. 다시 던지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선생님이 말리셨다. 애들 공 주으러 가기 힘들다면서... 그 후로도 내 던지기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돌팔매질로 떨어진 가래를 주어 모아 껍질을 벗기면 호두알같이 생긴 가래가 나온다. 가래는 껍질이 호두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상당히 단단하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호두의 절반도 안된다. 가래를 먹는 방법은 호두와 다르다. 나무를 때면 나오는 숯불을 모아 그 위에 가래를 올려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가래는 입이 벌어지는데 그 사이로 가래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따라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칼이나 숟가락을 이용하여 벌어진 사이에 넣고 누르면 반이 나눠진다. 뾰족한 바늘을 이용해 내용물을 파 먹으면 입안에서 도는 향기와 고소함에 그동안의 수고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따뜻한 숯불에 구워지는 가래의 그 고소한 향기는 지금도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어린 시절, 가을이면 커다란 가래나무에서 떨어지는 가래를 주워 모아 놓고 겨울이 올 때까지 맛있는 간식으로 먹었다. 몸에 좋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맛있기에 먹었던 것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는 크게 병이 나거나 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 어쩌다 몸살이 나도 하루 푹 쉬면 개운하게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했다. 요즘은 가래가 여러 가지 병에 효능이 있다고 하여 가래로 기름을 짜서 비싸게 팔리고 있다. 민간요법인지 아니면 실제로 효능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확히 검증된 효력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래가 이렇게 좋기는 하나,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기로는 가래나무는 무척 위험한 나무라고 들었다.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나무가 가지고 있는 독성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고기 잡을 마땅한 도구가 없을 때, 사람들은 가래나무 잎이나 줄기를 벗겨 찧어 즙을 내서 강에다 뿌렸다고 한다. 가래나무 즙을 강물에 뿌리면 고기가 하얗게 뒤집어져 맨손으로 고기를 주워 담았다고 들었다. 그 독성이 십리(4KM)를 간다고 들었으니 사실이라면 꽤나 독한 독성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겁을 주었으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래나무 껍질이나 잎의 즙을 먹지 않도록 초록색 껍질을 벗겨내고 항상 물에 씻었다.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독성마저 없애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조심성이 너무 과하지 않았나 싶다. 가래나무는 껍질이나 잎의 즙을 살짝 먹는다고 죽을 정도로 독성이 있는 나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행을 갈 때면 가끔 호두나무가 보인다. 잎과 같은 초록색 열매가 달려있는 호두나무를 보면 어린 시절 가래나무가 생각나곤 한다. 몇 년 전 우연히 어린 시절 살던 집 근처를 지나는 길에서 가래나무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러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텅 빈 그 자리를 보니 내 유년이 사라진 듯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토목공사와 개발사업 등으로 지형마저 바뀐 그 자리는 더 이상 유년의 추억을 회상할 현실은 없었다. 다만 기억 속 그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머물다 뒤돌아 설뿐이었다. 돌아서 발걸음에 코끝이 찡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