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기억
하늘에서는 싸라기눈이 촘촘히 내려 바닥을 뒹구는 아침, 온기마저 메말라 세상이 그렇게도 차가웠던 날이었다.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새로운 학교에 전학을 위해 출발을 했다. 학교에 가면서 어머니는 내가 다닐 학교는 분교라고 했다. 학생들이 적으니 선생님이 나한테 맞게 더 잘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거라고 말하셨다. 분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다른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내 발걸음은 그렇게도 멀게 느껴지는 등굣길은 처음이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학생들이 모여 수업을 하고 있었다.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는데 말이 수업이지 자습이었다. 선생님 혼자 4, 5, 6학년을 모두 가르치는데 수업이 될 수 없었다. 첫날 수업이라고는 문제를 풀다가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가서 문제를 풀고 집으로 온 게 전부였다. 이건 학교 수업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일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를 하셨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 두 주를 보내고 나니 외숙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내가 분교로 전학을 간 것을 알게 되었고, 외삼촌과 외숙모를 면담 요청하여 나를 다니던 학교로 다시 오게 해 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길어야 1년이니 도와주면 좋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끈질긴 설득에 두 분은 허락을 했고, 어머니와 상의하여 나는 작은 형과 외가댁에서 살게 되었다.
외가댁에 방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외사촌 동생들이 있었고, 외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외할머니와 방을 같이 썼다. 처음에는 외숙모가 우리에게 살갑게 대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외숙모는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나와 형은 외사촌 동생에게 장난도 안치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외사촌 동생이 걸핏하면 울면서 외숙모에게 뭔가를 일러바치곤 했다. 그럴 때면 외숙모는 우리들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외사촌 동생의 말만 듣고 우리를 야단쳤다.
외할머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외숙모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우리 편을 들어주지도 않고 가만히만 계셨다. 한두 번 그런 일들이 생기자 작은형과 나는 외사촌 동생들과 같이 놀 생각도, 말 붙일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 둘이서만 노는데 집중했다. 토요일만 되면 외가댁에 있기 싫어서 외진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갔다. 외가댁에서 이사 간 집은 상당히 멀었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가서 내려서 다시 걸어서 2시간 30분 정도를 산길을 통해 올라가야 했다. 차가 다니는 길이 있기는 했지만 구불구불 돌아서 가기 때문에 산길을 다니는 것이 한 시간 이상 빨리 다닐 수 있어서 우리는 매번 산길을 걸었다.
토요일에 오전 수업이 끝나고 외가댁에 들렀다가 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 2시간 30분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이미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이 되었다. 우리가 도착하면 어머니는 맛있는 반찬과 따끈한 밥상을 제일 먼저 차려주셨다. 당신은 밥숟가락을 들지도 않으시고는 우리가 먹는 모습만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식사하시라고 하면 "알았어. 어서 먹어라." 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바라만 보셨다. 그렇게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부엌에 가셔서 찬물에 밥을 말아 드시는 듯했다. 내가 같이 드시지 왜 부엌에서 혼자 드시냐고 하면 당신은 이게 편하다고 하시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성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외가댁이라 하지만 어린것이 남의 집에 가서 밥 먹고 다니기에 얼마나 눈치가 보일까 하는 걱정과 마음이 여간 아프지 않으셨을 것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으로 부엌에서 찬물에 밥 한 술 뜨는 것으로 미안함을 달래셨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어머니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셨다.
밥을 먹고 나면 어두워졌고, 자고 일어나면 얼마 안 있어 다시 외가댁으로 가야 했다. 가기 싫어도 학교를 빠질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요일 오후 2시쯤이 되면 다시 먼 산을 걸어 내려왔다. 먼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장난치고 놀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더구나 외가댁으로 가는 버스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시간에 한대 정도 있었기 때문에 시간 안에 당도하지 못하면 한 시간을 또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외숙모는 처음에는 우리가 주말에 집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으나 여름이 다가오고 농사일이 바빠지자 작은형과 나를 불러 소풀을 베어 오라고 시키기도 하고, 이것 저것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주말에 집에 가지 못하게 은근히 말렸다. 외숙모가 계속 우리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외삼촌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외삼촌은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우리가 소풀을 베어 오면 당연한 듯 받아서 소 먹이를 주곤 했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작은형과 나는 외가댁에서 외숙모의 눈치를 보며 주말에는 일손을 도우며 살았다. 주말에 어쩌다 우리 집에 가서 자고 올 때에도 우리는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해 겨울 어머니가 안 되겠다고 하시며 다시 읍내로 이사를 나왔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나서 어머니는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크게 화를 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외가댁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참고 계셨던 것 같았다.
사실 나중에야 어머니가 그 외딴곳으로 이사를 가계 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외숙모는 어머니에게 그곳으로 이사를 가면 살 수 있는 집도 제공해 주고 일거리도 주고 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어머니를 이사 가도 록 종용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쪽 마을에서 얼마의 돈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그랬던 것 같다. 외숙모는 뒤로는 호박씨를 까면서 겉으로는 어머니를 크게 위해주는 척 가면을 쓰고 있었고, 남들에게도 자신이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척 소문까지 그럴싸하게 내놓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착해서였을까? 아니면 혼자 자식들 키우느라 온 정신을 뺏겨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을까? 정말이지 우리 집 가족들은 왜 그리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만 득실대고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가끔 지난날의 어머니를 생각하고,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 저 바닥에서 꾸역꾸역 밀고 올라온다. 겉으로는 이미 지난 일이고, 잊어버린 일이라 되뇌고 있지만 실상은 입 밖으로 터트리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법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법률에 눈을 떴을 때는 아버지와 관련된 사건은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법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렇다고 당사자도 없는 상황에 우격다짐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가댁에 대한 설음과 분노는 증거 할 수 없는 상황과 현실에 발목 잡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법을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앞에 그저 어머니 주름 가득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그 뒤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더는 속고 싶지 않은 어머니가 당신이 확인하지 않는 것은 누구의 말이라도 믿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하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도 외숙모가 몇 번의 작당모의를 했었지만 어머니가 넘어가지 않으셨고, 그 뒤로는 상종 못할 인간이라며 연락을 끊으셨기 때문에 더는 그런 일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친정과 시댁의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모진 결정을 하시고는 힘들지만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무탈하게 자식들을 모두 잘 키워 놓으셨다. 어찌 보면 그들 자식들보다 우리들이 훨씬 더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들을 보지 않으신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사촌들과 연락을 하고 만나기도 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우리가 그들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우리들 생각이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우리는 그들에게 지금도, 앞으로도 당당하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그것만이 어머니의 고생과 희생에 대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난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없음을 알기에 오늘도 다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