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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개근상을 날렸다

유년시절의 기억

by 소향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학교는 무조건 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학교를 안 간다는 것은 왠지 죄를 짓는 범죄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학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메마른 가지에 초록빛이 얼굴을 내밀고, 겨우내 얼었던 땅은 어느새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 가슴 크게 벌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열린 방문으로 달려 들어오는 냉소 섞인 바람의 웃음에는 이미 봄내음이 흠뻑 스며들어 있지만, 아직 이브자리 털지 못하고 엎드려 마당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아랫배에서부터 치고 미세한 고통이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일어나기 싫지만 학교는 가야 했기에 찡그린 얼굴로 등교 준비를 위해 냇가에서 세수를 했다. 아직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반쯤 감긴 눈에는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배가 살살 아파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서자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가 많이 아프면 하루는 집에서 쉬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신다. 아직은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기에 가방을 챙겨 학교로 출발했다. 학교 가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등에 식은땀이 나오는 것이 썩 불편했다.


다른 날 같으면 친구들과 중간에 만나 도로 옆 시냇물에서 한바탕 놀다가 학교를 갔을 것이다. 봄이면 시냇물에 있는 돌 틈에서 가재를 잡아 아이들과 가재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하고, 개구리를 잡으면 멀리뛰기 시합을 시키곤 했다. 그것도 재미가 없어지면 풀 중에 빨대처럼 가운데가 비어있는 풀을 잘라 개구리 XXX에 꽃아 넣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개구리는 배가 엄청 크게 부풀어 올라 비만 개구리처럼 되었다. 그 상태로 바닥에 놓아주면 개구리는 뒤뚱뒤뚱거리며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기어서 도망을 친다. 그렇다고 개구리를 죽이지는 않고 잘 데리고 놀다가 살려줬었다.


그렇게 재미있던 등굣길이 그날은 그렇게 힘들었다. 겨우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는데 2교시가 끝날 때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왔다.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양호실에서 배 아픈데 먹는 약을 받아다 주신다. 그리고는 못 참겠으면 조퇴를 해 줄 테니 집에 가서 쉬라고 하셨다. 참을 수 없던 나는 조퇴를 하겠다고 하고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학교 정문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어른 3~4명이 팔을 벌려야 닿을 만큼 큰 잣나무가 있었다. 그곳까지 와서는 갑자기 볼일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지금껏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는 배가 너무 아파서 화장실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잣나무 아래에서 볼일을 시도했다. 여전히 안됐지만 여러 번의 작업(?) 끝에 드디어 봇물이 터졌버렸다. 세상에 그게 그렇게 시원한 줄을 그날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아프던 배도 더는 안 아픈 것 같았다. 뒤처리를 하고 흔적은 흙으로 엄폐시키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는 배가 안 아프지만 다시 학교에 돌아가기도, 그렇다고 집으로 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배가 완전히 낫은 것이 아닌 것 같아 일단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니 텅 빈 집이 왠지 허전했다. 온몸에 힘이 없어 어머니를 찾아 나설 수도 없기에 방으로 들어가 이블을 펴고 누웠다. 눕자마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이미 어두운 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몸이 이상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열이 펄펄 났다. 봄이고 이블도 덮고 있는데도 추워서 몸이 '덜덜덜' 떨려 왔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가 옆에서 물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 주고 계셨다. 밤새 몇 번을 깼다가 잠들었다가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어머니가 미음을 만들어 주셔도 먹지도 못하고 계속 앓아누웠다. 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몸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라 갈 수 없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내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고 떨어질까 싶으셨는지 손으로 잡고서 주무시고 계셨다. 아마도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시고 나를 간호하신 것 같았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을 살며시 내려놓고 이블을 덮어드리는데 화들짝 놀라시며 어머니가 눈을 뜨셨다.


"이제 좀 괜찮니?"

"네.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옷이 땀에 다 젖었어요."

"이제 살아났구나. 대답도 하는 걸 보니. 밤새 끙끙 앓기만 하더니."

"학교에 못 갔는데 어떡해요?"

"괜찮다. 형한테 너 아파서 못 간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했다."


하시며 안도의 미소를 지으신다. 그리고는 옷을 건네주며 갈아입으라 하시고는 부엌으로 가서 죽을 준비 해 오셨다. 죽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로 먹기 좋게 만들어 오셨다. 죽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데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는 다시 누웠다. 어머니는 다시 열이 나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하시고는 체한다며 좀 앉아 있다가 누우라고 하신다.


밤새 고생하셨을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라디오를 가져다가 어머니 좋아하시는 음악을 틀어드렸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미소 띤 얼굴로 부드럽게 바라보신다.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드신 어머니를 보고 음악을 끄고 옆에 누웠다. 곤히 잠드신 어머니의 숨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가 결석을 하니 몸이 많이 아픈지 걱정이 되어 친구들을 앞세워 찾아오신 것이었다. 선생님은 어머니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나에게 "내일은 학교에서 보자. 잘 있어." 하시고는 돌아가셨다.


내 초등학교의 꿈은 6년 개근상이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날 결석 한 번으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결석을 하지 않더라고 6년 개근상은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선생님과 같이 온 나와 경쟁을 벌이던 친구는 살며시 다가와 나에게 약을 올렸다. 나는 오늘 결근을 했으니 6년 개근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자기는 꼭 6년 개근상을 받을 거라고 했다. 이미 결석한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얄밉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날 난 학수고대하던 6년 개근상을 날렸다. 평생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6년 개근상에 대한 욕심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3년 후 졸업하던 날 그 친구는 6년 개근상을 탔다. 하루를 결석한 나는 개근상이 아닌 표창장을 받았지만, 6년 개근상을 받은 그 친구를 더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개근.jpg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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