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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 닭서리를 했다.

사춘기, 방황 대신 우리가 했던 일들

by 소향

누군가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미술 선생님이셨다.

"소향아, 이런 데서 자면 너 일사병 걸려."

"네, 조금만 잘게요."

"안돼! 빨리 일어나 집에 가서 자고 와라."

정신 못 차리고 자는 나를 선생님은 기어이 흔들어 일으켜 세우신다. 셋째 날 시험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가는 도중 너무 잠이 와서 살짝 누웠다 생각했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몇 시간을 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것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다가 자취방으로 향했다.


자취방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그대로 다시 철퍼덕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 자명종 소리가 시끄러워 눈을 떴다. 아침에 나가면서 혹시 들어와 잠을 자게 되면 일어나기 위해 미리 자명종을 맞춰놓았던 것이다. 시간을 보니 오후 5시였다. 족히 4시간은 넘게 잠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음 날이 마지막 시험이라 쉬운 과목들만 있어서 부담이 적었다. 그래서 게으름을 피우며 일어나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는 부지런한 친구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폈다. 한낮의 더운 기운이 사그라들어 시원한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친구들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책이 눈에 안 들어왔다.


3과목 남았고, 과목당 2시간씩 잡아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런 계산이 나오자 공부가 더 하기 싫어진다. 창밖을 내다보니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다. 창틀을 넘어 뛰어내렸다. 친구들과 각자 자전거 한 대씩 가지고 대로변으로 나가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다가 작당모의를 계획하게 되었다.


주화 : "시간도 널널한데 우리 닭서리나 할래?"

소향: "닭서리? 누구네 닭을?"

주화 : "내가 다 봐놓은 데가 있어. 따라오기나 해."

최은 : "소향아, 그냥 따라오면 돼. 가자."


주화, 최은, 이원, 그리고 나를 포함해 4명은 그렇게 우르르 자전거를 타고 몰려 나갔다. 세상은 온통 어둠 속에 덮여있고, 하늘에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그렁그렁한 밤이다. 한참을 달려 길가에 자전거를 멈췄다. 둘은 계곡으로 들어가 불을 지피고 둘은 닭서리를 해서 합류하기로 했다. 최은과 이원 둘을 보내고 주화와 나는 길 옆에 자전거를 눕혀 놓고 옥수수밭으로 숨어 들어갔다. 옥수수는 키가 커서 우리가 서 있어도 흔적도 없을 만큼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옥수수밭을 통해 타깃으로 잡았던 집에 다다르자 주화는 갑자기 나를 보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나서는 마대자루를 하나 건네면서 따라오라는 것이다. 살금살금 닭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바짝 긴장을 했지만 주화는 조심은 하는 듯 하나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혹시 꾼 아니야?' 하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안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주인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듯했다. 불빛을 통해 보이는 마당에는 흰색 개 한 마리가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심장이 콩닥콩닥하고, 머릿 털이 쭈뼛 일어설 것만 같은 것이 곧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주화는 닭장 문을 살짝 열더니 안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씨암탉을 한 마리 붙잡는다. 닭은 놀라서 '파드닥 파드닥' 거리지만 소리는 크게 내지를 않았다. 내가 재빨리 마대자루를 벌리자 주화가 닭을 던지듯 집어넣었다. 마대자루에 들어간 닭은 이내 조용하다. 한 마리 더 잡으려는 주화를 그만 하라고 말리고는 빨리 가자고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다가 주화의 인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봤더니 마당에서 개를 쓰다듬고 있었다. '미친놈 들키면 어쩌려고!!' 나는 큰소리로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애간장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등줄기에서는 땀이 흥건히 배어 나온다. 여전히 앉아서 개와 장난을 치고 있는 주화에게 작은 돌을 던졌다. "빨리 와 인마~!!" 나는 작은 소리로 재촉을 했다. 그제야 주화는 알았다면서 옥수수 밭으로 들어왔다. 올 때는 살금살금 들어왔던 것을 갈 때는 목덜미라도 잡힐까 싶어 줄행랑을 쳤다.


약속했던 계곡까지 와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마대자루를 번쩍 들어 보였다. 친구들은 기분이 좋은 듯 큰 소리로 환영을 한다. 나는 최은과 이원에게 진흙구이를 하라고 하고는 모닥불 앞에 앉았다. 주화는 그제야 도착해서는 내 옆에 앉으며 목장갑과 소금을 꺼내 놓는다.


소향 : "야 너 미쳤어. 걸리면 어쩌려고 그렇게 느긋해? 너 혹시 선수 아냐?"

주화: "하하하. 아냐 인마.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지."

최은 : "소향아, 저 새끼 미친놈이다. 신경 쓰지 마!"

이원 : "하하하. 그래. 미친놈 아니고서야 지들 집 닭서리를 지가 하겠냐."

소향: "뭐야, 그럼 그 집이 너네 집이었어?"

주화 : "어, 우리 집이야. 하하하"


그제야 이해가 갔다. 주화가 그렇게도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했던 이유와, 마당에 개가 짖지도 않고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주화, 최은, 이원은 같은 동네에 살아서 주화의 집을 잘 알고 있었고, 나는 다른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주화가 그 동네에 산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서 그 집이 주화네 집이라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화는 이미 친구들이 자기 집 과일 서리를 하면 같이 서리를 해서 먹고 하던 경력이 있었다고 했다.


이원이 구해 온 황토를 반죽해서 닭에 붙이고 그대로 모닥불 위로 올렸다. 닭이 익을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계곡물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겼다. 밤이라 물도 까맣게 보이고, 얕은 물도 깊게만 보인다. 그래도 시원하게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물장난을 치고, 수중 기마전도 하고 4명이 재미있게 놀았다.


밖으로 나오자 모닥불 위에는 닭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주화가 재빨리 목장갑을 끼고 닭을 꺼내 단단하게 굳은 황토를 돌로 깨내고 닭을 확인한다. "잘 익었다. 먹자." 주화는 자기가 먼저 먹어보고는 닭다리 하나를 뜯어 나에게 건네며 말한다. 자신의 동네에 온 나를 배려하는 듯했다. 소금을 들어 닭다리 위에 적당히 간을 한 후 한 입 베어 물었다. 토종닭이라 육질이 조금 질겼지만 맛만큼은 최고였다. 다른 친구들도 황토 사이에서 닭을 뜯어 소금에 찍어 맛있게 먹는다. 역시 공짜로 먹는 맛이 기가 막힌다. 기름기 쫙 빠진 닭고기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4명이 닭 한 마리를 뼈만 남기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다소 부족함에 아쉬우면서도 맛있게 먹어 기분 좋은 표정들이었다. "다 먹었으니 가서 공부하자." 주화가 빨리 가자는 듯 재촉을 한다. 사실 주화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친구다. 그러니 시험이 신경 안 쓰일 수 없을 것이다. 친구들도 서둘러 모닥불과 우리의 흔적을 지우고 정리를 했다.


그믐날 짙은 까만 밤하늘에는 성해가 흐르고 있었고, 무수한 별들로 세상이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를 자전거 4대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바람이 다시 귓가를 간지럽힌다. 맑고 신원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더없이 상쾌하다. 이런 기분이면 내일 시험은 모두 백점을 맞을 것 같은 기분 좋은 밤이었다.


요즘 같으면 닭서리를 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잘못하면 은팔찌를 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어린시절에는 아이들이 서리를 하는 것을 알고도 눈감아 주기도 했고, 걸리면 야단만 조금 치고는 보내주던 시절이다. 그렇기에 과일 서리는 자주 했던 기억이 있고, 닭서리는 두 번 정도 했던 추억이 있다. 어른들이 서리를 해도 눈감아주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 그래도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다른 곡식을 망치지 않았기에 봐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졌으나 정서적으로 메말라있는 요즘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자기 집 닭을 친구들과 같이 서리를 하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더구나 없지 않을까? 겨울이 깊어가는 시간 마음만은 따스했던 그 시절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 진다. 그 친구들 만나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같이 과일 서리라도 하고픈 지금이다.

닭서리.jpg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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