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방황 대신 우리가 했던 일들
처마 끝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흔적을 쌓아가는 시간, 찾아온 바람의 역시나 칼날같이 날을 세워 아리기만 한 계절이다. 그래도 매서운 바람의 끝자락에는 어디선가 찾아오는 훈훈한 봄내음이 묻어 있었다. 들녘에는 아직 남아있는 녹지 않은 눈들이 때 묻은 색깔에 힘겨워하고, 얼음 사이를 지나는 시냇물은 숨기려 애쓰는 순간에도 봄의 노래가 딸려 나와 미소를 띠게 한다.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친구들은 깡통과 못을 찾아들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아마도 뭔가 일을 꾸미는 것이 분명할 터였다. 바로 쥐불놀이를 준비하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던 나도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집 안팎을 찾아보았으나 빈 깡통을 구할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슈퍼를 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도 봤지만 이미 다른 친구들이 깡통을 다 가져간 뒤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다른 친구들은 이미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오늘 밤 일어날 일들에 나만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집안을 뒤졌다. 작은 깡통이라도 하나 나오기만을 바라면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깡통은 없었다. 힘없이 부엌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아 괜히 멀쩡한 신발만 걷어차고 있었다. 씩씩대며 심술만 부리던 내가 무심코 바라본 선반 위에는 하얗게 빛나는 뭔가가 있었다. <분유통> 바로 그것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호~~!!!"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맨발로 뛰어가 분유통을 집어 내렸다.
분유통은 아마도 어머니가 사용할 용도가 있었는지 깨끗하게 씻겨 있었고, 뚜껑까지 준비되어 선반에 고이 놓여 있었다. 분유통을 내가 쓰면 어머니한테 야단을 듣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것은 생각할 마음도, 여유도 없이 일단은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신발을 챙겨 신고 못과 망치를 들고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니 이미 다른 친구들은 벌써 절반 이상 깡통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자리에 앉아 작업을 했다.
바닥부터 못을 대고 촘촘하게 망치질을 했다. 옆의 둥근면은 적당한 사이즈 굵기의 나무를 넣어 찌그러지지 않도록 못질을 했다. 못으로 구멍을 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깡통에 구멍을 다 내고 나서는 입구 쪽에 매듭을 묶을 구멍은 좀 더 크게 뚫었다. 매듭은 군용 삐삐선(군용 전화선, PP 코팅되어 있고 안에는 철사로 되어 있어 잘 끊어지지 않는다.)으로 마무리했다.
이제 밤에 모닥불을 피울 나무와 쥐불놀이에 사용할 관솔을 준비해야 했다. 모닥불 피울 나무는 집에서 가져오면 됐지만 관솔이 집에 없으면 산에 가서라도 구해와야 했다. 관솔이 필요한 이유는 관솔에 불이 붙으면 잘 안 꺼지기 때문에 쥐불놀이를 할 때 맘대로 던지고 놀 수 있어서다. 먼저 가까운 친구 집에 가서 찾았으나 없어서 다시 우리 집으로 와서 찾았지만 우리 집에는 작은 조각 두어 개 정도뿐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친구와 산으로 올라갔다. 섞은 소나무 줄기를 찾으면 되기 때문에 구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한 시간 정도 산에서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썩은 소나무 뿌리를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가운데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빠질 거라 생각을 했지만 생각보다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친구와 둘이 힘을 합쳐 밀고 당기고를 수십 번 하자 드디어 뿌리가 옆으로 넘어졌다. 여전히 뿌리 한쪽이 붙어서 꿈쩍을 안 했다. 한 개 남은 뿌리는 낫으로 잘라내고 뽑아냈다. 산에서 관솔을 운반하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 마당까지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다. 도끼질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해 질 녘 이른 저녁을 먹고 예정된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혹시 불똥이라도 튀면 화재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름대로 안전한 장소를 정했다. 바로 큰 도로가에 있는 논이었다. 논에는 아직 소여물에 사용하지 않은 짚가리 한 동이 남아 있었고, 그 외에는 별다른 화재의 위험이 없었기 대문이다. 준비한 나무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목장갑을 끼고 깡통에 숯불을 담는다. 그 위에 관솔을 채워 넣는 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줄에 매달려 돌아가는 깡통으로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거리를 두고 깡통을 돌렸다. 처음에는 숯불만 빨갛게 달아오르다가 계속 돌아가는 사이에 관솔에 불이 붙는다. 깡통에 매달려 돌아가는 불꽃이 춤을 춘다. 깡통을 돌리는 친구들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는 시간이면 관솔에 붙은 불은 절정을 이룬다. 이때 돌아가는 깡통의 줄을 놓으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불꽃놀이가 된다. 곳곳에서 동글동글 돌아가는 불들이 밤하늘을 밝히면
우리들만의 축제가 벌어졌다.
"텅~!!!" 하늘을 날던 깡통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깡통에 타오르던 불꽃이 사방으로 날았다. 순간 깡통을 날렸던 두 친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버렸다. 깡통이 서로 부딪히면서 방향이 바뀌어 짚가리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깡통을 돌리던 친구들 모두 돌리던 깡통을 멈추고는 떨어지는 불꽃을 바라봤다.
"큰일 났다~!!"
"불이야~!!, 불!!!"
"빨리 뛰어가서 양동이에 물 받아서 가져와!"
나는 가까운데 사는 친구한테 양동이에 물을 받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모닥불 앞에 놓여있던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고 짚가리로 뛰어갔다. 커다란 관솔이 떨어진 자리에는 벌써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막대기로 불붙은 짚단을 찍어 아래로 내 던졌다. 하나, 둘, 셋 생각보다 불씨가 떨어진 짚단이 여러 개 었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떨어뜨린 짚단의 불을 발로 밟아서 껐다. 그러는 사이 다른 쪽에 작은 불씨에서도 이제는 불이 커지기 시작했다.
"소향아, 빨리 내려와. 위험해~!!"
불났다고 외치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던 동네 아저씨가 양동이에 물을 받아가지고 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래도 짚단 하나를 더 끄집어 내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크게 떨어진 불씨는 들어냈지만 작은 불씨에서 붙은 불이 커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양동이에 물을 바가지로 퍼서 불타는 짚단 위로 뿌렸다. 그 사이 친구도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서 같이 물을 뿌렸다. 타오르던 불이 드디어 사그라들어 꺼졌다.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아저씨에게 무진장 혼이 났다.
그 사건으로 그날 쥐불놀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모닥불도, 활활 타고 있는 깡통의 불도 모두 물세례를 받았다. 그나마 불이 크게 나지 않은 것 하나만으로 다행이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자 나는 또 한 번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불이 날 뻔했던 일과 어머니가 사용하려고 준비해 놓으신 깡통을 사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되는 일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정월대보름 날 밤하늘에 떠있는 둥근달이 온통 세상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때로는 비웃는 듯, 때로는 괜찮다는 듯 그렇게 머물러 가만히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