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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추억

유년시절의 기억

by 소향 Dec 23. 2020

시골마을의 겨울밤은 고요하기만 하다. 눈 덮인 새하얀 들판 위를 시리도록 밝은 달이 비추면 세상은 낮인 듯 환하게 밝아오고, 때를 기다리는 부엉이의 울음소리만 구슬프게 들려온다. 무릎까지 쌓인 눈으로 먹이를 찾으러 내려온 토끼가 부엉이의 울음에 그만 화들짝 놀라 덤불숲으로 달아나고, 날아오르던 검은 그림자는 갈길 잃은 날갯짓만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밤이다.


저 멀리 보이는 교회 예배당에는 성탄절을 알리는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한 불빛을 발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머니는 선물을 준비한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으시는 어머니지만 이상하게 그날만큼은 선물을 준비했다. 물론 그 선물은 우리가 받는 선물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왠지 마음이 두근거리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잠드는 시간은 여전히 9시쯤이었던 것 같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다 보면 고요하던 밖이 소란스러워지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꿈인 듯 이블 속으로 파고들어 좀 더 잠을 자려고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꿈이 아니었다. 문 밖은 흰 눈이 쌓여 얼어 있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라 나가기는 싫어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다. 한참 후 노래가 끝나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선물을 들고나가셨다. 선물이라야 아이들이 좋아할 과자를 종류별로 사서 포장한 것이었다. 


사람들과 몇 마디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면 그제야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이렇게 추운 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며 찬송가를 불러주는 학생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뭐라도 하나 들려서 보내셨다. 믿지도 않는 종교의 행사지만 그 마음과 학생들의 마음을 배려한 것이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동네 친구들 4명이 나를 부르러 왔다. 


"소향아~!! 교회 가자."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빨리 가자. 빨리 가야 좋은 자리 앉는단 말이야."

"알았어. 잠깐만~"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성탄절이 되면 친구들이 교회에 꼭 데리고 갔다. 교회에 가면 과자와 작은 선물 같은 것을 주었기 때문에 나도 굳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귀마개와 장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내가 신발도 신기전에 친구들은 마음이 급한지 벌써 뛰어가기 시작한다. "같이 가~!" 소리를 지르며 쫒아가자, 친구들이 뒤돌아보며 손짓하며 빨리오라고 한다.


그렇게 뛰어서 도착한 교회 예배당에는 이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고, 예배당 곳곳에 놓여있는 난로에는 톱밥이 타오르며 뿜어내는 열기에 훈훈하게 느껴진다. 이미 뛰어오느라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우리는 예배당 가장 앞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어차피 크리스마스 날에는 통합예배로 한 번만 드렸다. 예배가 끝나면 밤새 형들이 마을을 돌면서 가가호호 방문한 수고가 우리들의 간식이 되어줄 것이다. 그 간식을 제일 먼저 받기 위해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배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학이 되면서 집에서 노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예배를 1년에 한 번만 참석하다 보니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는 것이 왜 그렇게도 힘든지, 저절로 엉덩이가 들썩 들썩댔다. 밖에 나가서 뛰놀고 싶고, 집에도 가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버리면 간식을 받을 수 없었다.


친구들과 소곤소곤 장난도 치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바라본 창밖에는 흰 눈이 날리고 있었다. 이미 눈은 쌓여 있었지만, 또다시 눈이 내리는 진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눈 내리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벌써 밖으로 나가 눈싸움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교회에서 주는 선물은 잊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선공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선물을 제일 먼저 받고 무조건 뛰어나가 입구 옆에 노간주나무 옆에서 눈을 뭉쳐놓고 가장 먼저 나오는 친구들부터 순서대로 공격해서 승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혼자는 승산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맞는 친구 옆구리를 쿡 찔러 창밖을 보라고 눈빛을 보냈다. 그 친구는 내 의도를 이해했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얼마 후 예배가 끝나고 잠시 기다렸다가 과자 선물이 나눠졌다. 두 사람은 선물을 받자마자 내 달렸다. 교회 밖으로 나온 그 친구와 나는 양쪽으로 나누어 재빨리 눈을 뭉쳐 준비를 했다. 나는 친구에게 공격한 후 논으로 뛰어가서 짚가리 뒤로 뛰어가라고 하고, 다시 쫒아오면 친구는 가장 먼저 오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그 친구의 목덜미로 눈을 쓸어 넣기로 했다. 항복 선언을 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명을 아웃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드디어 적군이 되는 친구들의 모습이 사람들 틈에 섞여 나타났다. 아직도 눈치를 못 챘는지 받은 선물에 싱글벙글이다. 우리는 재빨리 눈덩이를 들고 두 사람을 공격했다. 첫 번째 눈이 가슴으로 날아갔다. 한 대 맞은 친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는지 눈을 날아오는 눈을 피하면서 쫒아왔다. 쫓아오는 친구를 향해 만들어 놓은 눈덩어리를 다 던지고서 약속된 짚가리 뒤로 뛰었다. 나와 한편인 친구도 비슷하게 도착을 했다. 짚가리 뒤에 숨었다가 발자국 보고 쫓아오는 앞선 친구의 팔을 우리 편이 잡아챘다. 휘청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짚가리 위에 쌓여있는 눈을 그대로 긁어 그 친구의 목덜미로 밀어 넣었다. 


기습공격은 대성공이었다. 엄청난 양의 눈이 몸으로 들어가자 그 친구는 항복을 선언했다. 뒤에 쫓아오던 친구는 한 명이 그렇게 당하자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리기에 자신 있던 나는 그 친구를 금세 쫓아가 잡았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고 붙잡고 있자 뒤에 오던 친구가 역시나 눈을 그 친구의 목덜미로 밀어 넣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했던 친구는 너무도 쉽게 항복을 했다. 


한바탕의 눈싸움이 끝나자 이미 옷은 땀에 흠뻑 젖었고, 온몸에서는 따뜻한 체온으로 인해 김이 무럭무럭 올라가고 있었다. 눈을 흠뻑 뒤집어썼던 친구들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 서로의 모습이 너무도 웃겼다. 눈 속에서 비 맞은 몰골을 하고 서로를 보며 한바탕 웃었다. 조금 있으면 체온이 떨어지면서 추위가 몰려올 것이 뻔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뒤로 축축한 발자국이 따라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내려와 세상을 따뜻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스럽던 눈싸움은 그렇게 흔적조차 사라지는 시간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하루는 그렇게 소리 없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미지: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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