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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Sep 02. 2020

잠깐, 생각 좀 할께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지..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즈음의 이야기다.




20여 명의 수강생으로 가득 찬 좁은 강의실에는 서먹한 기운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인문학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한겨레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인문학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수험이 목적이 아닌 교양 강좌임에도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일이다.   


나는 수강생 면면을 둘러보며 자리를 탐색하고 싶었지만 소심한 성격에 바로 포기하고, 이내 출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제일 앞자리에 착석했다.  단지 타인의 낯선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앉기 시작한 강의실 맨 앞자리는 대학시절을 포함해 수많은 교육에서 나의 고정석이 되기 일쑤였다. 남들은 기피하는 자리었지만 나는 오히려 매번 어디에 앉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번거로운 상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물론 강의자의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는 자리이기도 해서 나는 수강생들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그날의 컨디션과는 상관없이 시의적절한 고개 끄덕거림과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아~’하는 탄식으로 강의자의 기운을 북돋는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사실 나는 내 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나만큼 수업에 집중을 하고 있는지, 강의자의 말에 동의를 하는지,  혹시 졸거나 딴짓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등 궁금하긴 했지만 더러 강의자가 던지는 농담에 나를 포함해 십여 명의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강의에 몰입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사람들은 일 년에 두세 번도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의 생각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 조지 버나드 쇼-



자신을 386세대라고 칭하는 강사는 어림잡은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고, 뱃살 없는 날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는 데다 민머리를 불가피한(?)한 사정에 의해서가 아닌 '스타일'로 소화하고 있는 듯했다. 특이한 점은 강사의 어투에 있었다. 사투리를 쓰지는 않았지만 딱히 표준어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들쑥날쑥하면서도 파~솔 수준의 높은 목소리 톤은 ‘인문학에 대한 사유’라는 심오하고 졸린 주제를 보다 가볍게 소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기도 했다.  칸트, 헤겔, 공자, 맹자,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등의 수많은 인문학 위인들과 그들의 복잡한 이론과 일화들을 통해 인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는 무거운 수업이었지만 나의 뇌는 지치지 않고 강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허겁지겁 흡수했다.  고기를 너무 먹지 않으면 고기가 먹고 싶은 것처럼, 오랜 시간 인문학의 문외한으로 살아오면서 내게 뭐가 부족한지조차 알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갈급함이 내 정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 스킬을 습득하고, 바쁘게 산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생각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인문학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면 한 마디로 ‘쫓기는 삶’ 그 자체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했고, 대학에 들어갔고,  흔하디 흔한 유학을 다녀왔으며, 그렇게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사회인이 되었다. 사회인이 된 후에는 일 년에 몇 번씩은 꼭 많은 돈을 들여 해외여행을 갔고,  고급 스포츠를 배우는데 수백만 원씩 지출했으며,  어학원을 다니며 외국어 감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남들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살면서 꽤나 치열하고 우수하게 잘 살아왔노라고 우쭐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서 언제 가장 치열하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딱히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분명히 나인데 난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남들이 설계해 놓은 대로 내 인생을 끼워 넣었던 것이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양배추처럼 살게 된 거지?



근 10년간의 사회생활을 잠시 정리하고 다음을 위한 도약을 준비하던 중에 과연 이대로 또 아무 문제의식 없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된 것이다.  수저 논란,  이생망-이생은 망했어, 20-30대 정리해고, 갑질 논란  등으로 미디어가 떠들썩하자 나의 의심은 더더욱 짙어졌다.  


'난 왜 단 한 번도 내 인생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지? '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인생 선배들은 ‘사는 거 별거 없다’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라고도 했다.  그 말로 현재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얼마든지 감내해야 하는 당위라고 조언했다. 그런 말로도 위안이 안될 경우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가 있을지로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늘 허무하게 무너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산다’라고 하는 거대한 명제 안에서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의 소설 [신]에서 언급한 ‘벼룩의 자기 제한’처럼 그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테두리'를 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맹자-


나는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잠시 유예시키기로 결정했다.  오늘 뭐 먹지? 이번 주에 누굴 만나지? 와 같은 인스턴트식 사고에서 탈피해야만 했다.   내 남은 삶을 보다 가치 있고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성찰과 고찰이 필요했다.  얼마든지 생각이라는 힘을 통해 내 인생을 다르게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가 잠시 인생이라는 무대의 커튼을 내리는 가장 절실한 이유이기도 했다.  

‘인문학에 대한 고찰’이라는 수업을 듣게 된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강사는 인문학적 사유야 말로 모든 사물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한 분야의 전문성이라고 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인문학적인 사유와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남다른 깊이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내장 질병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해결 방법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의사가 단순히 의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조리한 사회 현상에 따른 스트레스가 인간의 신체 및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계하여 글을 쓴다면,  그의  글은 단순한 의학적 지식을 나열하는 따분한 설명서가 아니라  지성인으로서의 사유를 담은 인문학적인 결과물이 될 터였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나의 경험과 지식에 사유를 더할 줄 아는 지성인이  되고 싶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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