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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Mar 01. 2021

언니, 그때 그거 학대였어.

내 생애 첫 가스 라이팅의 추억   

*가스 라이팅(gaslighting)*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


엄마의 '맏이'와 '막내'에 대한 기대와 사랑은 남달랐다.

나는 세 자매의 둘째로 태어났는데  엄마는 그중에서 유독 세 살 많은 큰 언니와 열 살 어린 막냇동생에 대한 큰 애착을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큰 언니에 대한 무한 신뢰에는 '첫째라서'가, 막내 동생에 대한 무한 애정에는 '막둥이라서'가 수식으로 따라붙었지만 그 어디에도 '둘째라서'는 없었다. 희한했다. 태어난 순서가 사랑의 이유가 되는 셈이었는데, 그 와중에 둘째는 그 어떠한 유의미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듯했다. 단지 두 번째 순서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관심의 이유가 되기도 한 것이다.


나의 존재 가치는 언니의 존재로서만 증명되었다.

언니가 입던 큰 옷과 헌 책을 물려받고, 언니의 용돈에 기준해서 나의 용돈이 정해졌으며, 둘이 동시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우선권은 항상 언니에게 있었다. 언니가 먼저 한 것들 안에서만 선택권이 주어졌다. 다행히 거기에 큰 불만이 없었다. 심지어 어떨 때는 내가 어렵게 내린 나와 관련된 의사 결정조차도 언니의 일방적인 의견에 뒤집어지고는 했는데, 그마저도 언니의 당연한 권리로 여겼을 정도다.  나에 대한 언니의 영향력이 그렇게 막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부모님의 공식적인 허용이 큰 역할을 했다.  '언니가 하는 말에!' '언니가 시키면 해' '언니 말 무조건 잘 들어'와 같이 모든 면에서 언니는 내가 본받아야 할 절대적인 롤모델이 되어있던 탓에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언니의 손찌검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나는 언니를 부모님 이상의 절대적인 의존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언니의 첫 폭력은 내가 중학교 2학년, 언니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되었다.  이유는 '대들어서'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흐릿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니의 어떤 말에 화가 나 비아냥거리며 대꾸했던 게 화근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나는 키 순서로 번호가 매겨지는 학교 시스템에서 늘 12,13번을 다투던 또래보다 작은 아이 었고, 언니는 나와 정확히 반대로 우리 둘의 체급 차이는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이로는 불과 세 살 차이이지만 나는 언니에게 감히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된 언니의 폭력은 얼굴 한 두대 손으로 때리고, 몸 한 두 번 발로 차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도 선명하지만 60kg 체급의 고2 여학생이 40kg 체급의 중2 여학생을 풀타임으로 1시간 이상 때리는 일이 벌어졌다.  코피가 터졌고, 얼굴과 몸 곳곳에 푸르스름한 멍이 들었으며, 머리털은 야구공만 한 크기로 뽑혀 방 안을 굴러다녔다.


그런데도 언니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잠시 뿐이었다. 몸과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언니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동생이 언니한테 대드는 게 잘못이지'에 대한 논리에 스스로 설득되었다.  

그 후로 언니의 폭력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분명한 것은 훈계 목적의 체벌은 아니었다. (3살 터울에서 훈계가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언니는 단 한 번도 왜 때리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두 가지는 맞을 당시의 스스로의 처신을 분 단위로 되짚어보며 '맞을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를 찾는 것언니의 눈치를 잘 살피며 맞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다. 언니와 나의 관계가 여느 자매와 달리 묘한 주종관계가 형성된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언니의 말이 내게는 곧 법이었고,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언니가 하라고 하면 했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았다. 내게 언니 말고는 없었다.




"이게 마지막으로 때리는 거야"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심쿵'하는 말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  귀가 시간을 두고 나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던 언니가 어금니를 앙다물며 말했다.

솔직히 '앞으로 안 맞는다!!'라는 생각에 몇 분 뒤 자행될 폭력을 앞두고도 묘하게 설레기까지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 언니와 나는 보다 첨예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내 세상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가 언니 었는데 대학에 가보니 친구들, 선배들, 교수님 심지어 나를 제일 아껴주는 남자 친구의 존재로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면서 언니 말고도 내 편이 많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그럴수록 언니는 나를 더 통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시 언니와 나는 대학교 인근에서 함께 자취 중이었는데,  통금 시간을 정해두고 5분이라도 늦으면 내 짐을 이민 가방에 담아 문 밖에 내놓고 문을 잠그는가 하면, 부모님이 준 용돈을 일부러 전해주지 않거나, 수시로 인연을 끊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런 언니의 이상한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이기에 나는 이미 훌쩍 커버렸다.


마지막이니만큼 '싸워서 이겨보자'는 생각으로 방어를 하기는 했지만 학창 시절 체급 차이에서 변화가 없던 탓에 역부족이었다. 언니는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하게 때리는 것으로 수년간 자행된 동생에 대한 폭력의 역사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듯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언니는 돌연 종적을 감췄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 안이 그야말로 휑했다. 몇 번이고 꿈인지 생시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눈을 비벼댔지만 내 방의 물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 도둑이 들었나? 그런 것 치고는 집이 너무 깨끗한데? 여러 가지 추측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가운데, 그날 오후 우리 집에서 이삿짐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웃 주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짓말처럼 언니는 혼자 이사를 나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언니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제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단번에 언니 목소리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예의도, 배려도 없이 사라진 언니는 생각 이상으로 무미건조했다. 그 흔한 '잘 지냈어?'라는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  그저 국제 이민에 필요한 서류를 떼 달라고 요청해왔을 뿐이다. 언니에게 쏟아내고 싶었던 원망도 이미 유효기간을 상실해 무의미한 단어 조각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5분 간의 대화는 행정 공무원과 민원인 정도의 온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끝났다.


언니가 내게 했던 행동들은 명백히 학대였다. 언니는 언니라는 이유만으로 동생인 나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정신적, 신체적으로 수년간 괴롭혔다. 다만 당시에 가해자였던 언니도, 피해자였던 나도 그 무시무시한 의미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가해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것을 미필적 고의라고 부른다.


내가 굳이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들추어내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렇게 모든 가해 행위로부터 무책임하게 도망쳐버린 언니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언젠가는 진심으로 반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때는 다 그렇게 자랐어' 또는 '다 동생을 위한 거였어'라는 말도 안 되는 위안을 삼고 있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이 인터넷 상에 지속적으로 돌고 돌아 결국 먼 나라에 있는 언니 자신에게까지 도착하게 되는 그 순간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언니, 그때 나한테 했던 행동들... 분명히..학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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