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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Dec 14. 2020

가난이 부끄러웠다

가난보다 슬픈 건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

"자, 그러면 다음 상담 때는 집에 있는 노트북 준비해서 화상으로 만나요"라고 말하자

".. 선생님.. 저 노트북이 없는데요.."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 안면을 가격한다.

'미쳤지... 노트북이 어디 한 두 푼이야..? 그게 왜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네가 이제 살만하구나?'  아무리 자책을 해도 학생에게 괜한 상처를 준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시리다.




1.  가난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형편이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학창 시절 내내 돈 때문에 허덕였지만 그렇다고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수준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끼니를 거르는 법은 없었지만 영양소 균형이 갖춰진 제대로 된 식사는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항상 배가 고팠다.


남들처럼 교복도 사 입고, 등록금을 포함하여 학교에서 청구하는 각종 비용도 꼬박꼬박 납부하고, 단과학원과 독서실도 종종 다녔다. 수학여행이나 소풍에도 절대 빠지지 않았으며, 매일 도시락도 싸가지고 다녔다.


그 모든 과정에는 빠지지 않고 '돈'이 들었다.


2.  다만, 그 모든 과정이 '시련'이었을 뿐이다. 


방 한 편에 '금쪽같은' 교복 한 벌이 걸리고, 꼭 필요한 문제집이 책상 위에 놓이기 위해서는 매 번 나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엄마 앞에 서야 했다. 그리고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라도 하듯 "문제집 사야 해요.."라는 말을 목구멍에서부터 꺼냈다. 우리 집에 돈이 없다는 것을 이미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크던 작던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수험공부보다 더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제 때 납부한 적 없었던 등록금은 의도치 않게 내 이름 석자를 전교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잔인한 행정처리이지만..) 미납부자 명단에 들어간 학생들 이름을 학교에서는 '친절하게도' 모두의 귀가 열려있는 점심시간 교내방송으로 읊어댔던 것이다.  그럴 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야! 너 또 내 것 먹어??"라는 친구들의 어김없는 핀잔에도 "너네 엄마 반찬이 맛있다고~" 라며 넉살 좋게 도시락을 어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실은 내 도시락이 전날 밤 담아둔 식은  맨 밥과 참치 통조림 캔 하나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백하건대 내 주머니에는 당장 끓여먹을 라면 한 봉지 값도 없었다.  


3. 가난이 나의 정체성이 되는 게 두려웠다.


엄마표 반찬에 보온도시락을 챙겨 오는 친구들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야자(야간 자율학습) 후에 정문 앞에 줄지어 있는 눈부신 픽업 세단들과,  동네 시장이 아닌 백화점으로 쇼핑을 다니거나 방학 때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나의 초라한 형편을 매번 실감케 했다.


친구들의 평범한 일상이 내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지만

그런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혹여나 내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4. '가면'을 쓰기로 했다.


연막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왈가닥이 되기로 했다. 쾌활하고 명량한 모습으로 선생님들로부터 호감을 샀고, 학급 임원으로 선출되어 궂은일도 자처했으며, 누구라도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광대가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참고로 나는 태생부터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내성적인 사람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에 사람들은 내 계획대로 나를 오해하기 시작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천방지축 외동딸(?)'

 그러는 사이 나는 나의 불우함을 더욱 철저하게 밀봉했다.  


5. 결국,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스스로 가난을 부끄러워한 탓에 그 사실이 언제고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집안 형편과 나라는 사람이 완벽하게 별개라는 강박은 내가 입고, 먹고, 마시고, 배우는 모든 것에 과도한 힘을 쏟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축적된 노력은 데이트 상대의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라는 호의를 "초면에 집에 왜 바래다주나요?" 라고 발끈하는 것에서 늘 힘없이 무너져버리고 마는 허상에 불과했지만.

       

6.  뭐 어때? 이렇게 사는데?


어느 날 동생이 친한 친구를 데려와 집에서 하룻밤을 재웠다. 당시 동생은 좁은 다용도실을 방으로 겸해서 쓰고 있을 때였다. 동생에게 "뭐하러 데려와.. 누추한데.."라고 말했다. 사실은 '언니가 여기 사는걸 남이 알아버렸잖아'는 질책이 담긴 말이었다. 동생은 배를 긁으며 대답했다.


"뭐 어때? 우리 사는 곳인데. 쟤도 아무 생각 없을걸?"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은 가끔 이렇게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현자 같은 말로 언니를 부끄럽게 할 때가 있다. '결국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훌륭한 감추기이자 꾸밈'이라는 진리를 내 동생은 나보다 먼저 깨우치고 있었던 것일까. 


7. 가난은 핑계였다.  


시간이 흘러 나도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결혼을 했고, 심지어 학창 시절의 가난을 "라떼는 말이야"라며 추억 삼아 이야기할 정도로 이제는 제법 먹고살만한 형편이 되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학생들에게 한 없이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도 혹시라도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주변 환경으로 인해 겪고 있을지 모르는 말 못 할 곤란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이다.    

그것은 가난으로 위축되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고스란히 향해있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난'이라는 두 글자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소위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반찬이 참치캔뿐이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담아 엄마가 손수 싸줬더라면,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잘했다"라는 칭찬을 들었더라면, 웃풍이 드는 옥탑방이라고 해도 온 가족이 모여 살며 온기를 나눴더라면 과거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정우성 배우님의 말처럼 "가난은 불편하기는 해도 창피하지는 않았다"에 공감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은 그저 허울 좋은 원망 대상에 불과했다. 가난에 누명을 씌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난을 핑계로 나를 사랑할 시기를 놓쳐버린 어른들에 대한 깊은 원망이자, 나 자신에 대한 동정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평생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다.  


학창 시절의 나는 지독히도 외로웠다.





노트북이 없다는 학생의 한 마디에 "아, 노트북이 없구나. 쌤 거 빌려줄게" 내지는 "아, 없을 수도 있지"라고 태연하게 반응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나의 불우했던 학창 시절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학생의 형편에 대해 제멋대로 단정한 것만 같다.


'그냥 노트북 살 시간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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