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는 어둠이라도 익숙하다.
지금 난 아무것도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가락 감각만으로 키보드를 누르고 있다. 불빛은 오로지 모니터의 불빛. 이걸 의지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키보드로 입력되는 글자가 맞게 써지고 있는 볼뿐이다. 깊은 어둠만큼 내 마음도 고요해진다.
어둠 속에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자주 그런다고 답할 수 있다. 가끔은 어둠 속에서 키보드와 둘이서 미팅을 할 때도 있다. 의미 없는 두드림을 할 때도 있고, 검색을 할 때도 있다. 그렇게 키보드는 내 친구처럼 이 어둠 속에서도 내 곁에 머물러 준다.
나는 아주 작은 키보드를 쓴다. 만약 남편이 쓴다면 손바닥 하나 사이즈로 양손으로 타이핑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 키보드에만 앉으면 독수리가 되는 그런 사이즈다. 그런데 내 키보드는 구매한 지 이제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자주 쓰는 한글 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나의 노력의 증거같이 말이다. 이젠 감각으로 어떤 곳에 무엇이 있는지 혹은 틀리게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랜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 나는 친구가 없었다. 나의 어릴 적 나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세상의 내 편이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나는 아무도 없는 외로움 속에서 컸다.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했다. 초등학생이 교회에 직접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 외로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그랬다. 종교의 자유 속에 절에도 가봤고, 스님 곁에서 애교도 떨어졌다. 동네에 있던 늙은 여자 노스님은 그런 날 예뻐해 주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웃을 때 눈매가 가늘어졌었던 그 모습이 말이다.
그때도 나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내 안의 소리를 들으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끄적임이 시작되었을 때는 중학생 때였다. 시를 썼고, 그 시는 내가 친구를 만드는 소통 창구가 되어 주었다. 내 곁에 모인 친구들은 나의 글을 좋아해 줬고, 덩달아 나를 좋아해 주었다. 처음 친구가 생긴 거였다. 그 친구는 지금도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며 나의 글을 응원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가 이 어둠을 좋아하는 이유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 있으면 세상이 고요해진다. 그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작은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때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그게 좋다. 이 시간 오로지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에 심취해 내 글을 쓰는 것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원래는 소산 백서 시인님이 주신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외국에 여행을 가시면서 비행기에서 찍은 구름 위 사진이었는데, 그걸 보고 어딘지 모를 벅찬 느낌에 쓴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글에선 사진이 없는 것이 더 나을 듯하여 뺐습니다. 에세이라는 것이 신기하군요. 제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이 정말 신세계는 맞는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글을 쓰다 보니 이상하게 어릴 적 제가 떠오르네요. 그때 저는 어렸고, 외로웠습니다. 혼자가 익숙해져야 하는 아이였죠.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죠. 중학교 때 저의 좌우명은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서 나왔던 한 구절이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 드려야 한다.]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적으며 운 기억이 있네요. 저는 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매번 그렇게 제 삶을 만들어 갔죠. 지금 저의 좌우명은 [오늘을 살자!]입니다. 왜냐면 오늘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