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저자(글) 창비
책을 주문한 게 지난 일요일이었다. 많은 유튜브 책 읽어주는 방송과 블로그를 통해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유명한 책에는 크게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다. 독서토론을 위한 구매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보지는 않는다. 앞에 소개한 바와 같이 다양한 시점과 영혜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해한 내용, 설명불가한 전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등이 이 책에 붙는 수식어였다. 그러나 나는 쉽게 다가가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 보면 고통 3부작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실제 내가 느낀 점도 인간이 겪는 고통이기도 했다.
첫 번째 이야기 채식주의자 같은 경우 솔직히 영혜에 대해 이해가 되었다. 꿈 때문에 채식을 하게 된 영혜처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 도축하는 장면을 보았다. 내가 어릴 적에는 꼭 도축장이 아니어도 되었던 시절이었다.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다니던 학창 시절 오후반 때 일이다. 소와 돼지를 잡는 장면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동물의 눈과 표정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때 났던 피비린내가 여전히 선명하다. 이때 이후로 육고기를 안 먹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영혜에게 꿈은 그저 매개처였을 것이다. 그동안 쌓인 것들의 표면상으로 보인 첫 번째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블로그 이웃님의 책리뷰때문이었다. 보고 읽었던 내용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다. 해석이 없는 글이라 채식주의자를 하게 된 영혜에 대한 호기심이 자동으로 생겼다. 인물이 궁금해졌고, 세 편으로 나눠져 있는 각 내용의 전개도 궁금했다. 이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호기심이었다. 어떻게 세 명의 인물이 어색하지 않게 어울려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글을 결국 마지막 장을 덮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내용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어느 날 꿈을 꾼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되면서 이어지는 꼬꼬무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단지 그녀가 채식을 선언한 것뿐인데,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사실이 그녀를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한 번의 몸부림을 시작으로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가족 앞에 그녀는 서서히 치쳐 갔는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이야기는 남편 시선의 영혜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형부의 시선의 영혜, 세 번째는 언니 인혜 시선의 영혜.
그 어디에서 영혜의 시선은 없다. 마치 그녀의 삶을 말해주듯이 말이다. 이 책이 난해, 복잡, 어렵다는 이유는 알 것 같다. 그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에서는 없는 일화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정신 병동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본 작가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싶다. 보통 사람에게 이상한 영혜, 그렇지만 알고 보면 영혜뿐만 아니라 인혜, 형부,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시선은 보편적인 걸까?
자신의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갖는 호기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영혜를 보살피는 인혜. 이기적이도 하고 이해되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하려고 한다. 날 위해 너쯤은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형부였던 그가, 인혜가 말이다. 위한다는 명분도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본 채식주의자는 그랬다.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내 상식을 벗어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그랬기에 이걸 읽는 사람이 불편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 설정들에 가려져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못 보는 것은 아닐까? 인간 내면에서 오는 공포와 고뇌, 그대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망가져 버린 영혜가 어쩌면 제일 큰 자유를 찾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녀는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았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못하는 부분은 인상 깊었다. 음식 거부는 곧 죽음이라고 말하는 의사와 병원 관계자들이 그녀의 죽음이 아닌 그녀가 왜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면 영예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다.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채식을 시작했는지 왜 나무가 되려고 하는지... 한 사람이라도 이해해 주는 이가 있어서 다른 각도로 다가갔다면...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 책에서 영혜는 미친 여자다. 가슴을 내보이고, 꽃 그림에 흥분하고,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미친 여자. 그런데 미친 여자라 정의는 누가 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된 영혜에 대해서 궁금했다. 물론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녀가 물구나무를 서 있다면 한 번쯤은 나도 옆에 물구나무로 서 있어 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각 시점에서 나온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다. 그들은 정신을 부여잡고 있으며, 모른 이가 보면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다. 알고 보면 속내에 있는 시꺼먼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본 사람은 인혜였을까? 인혜는 스스로 보통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녀도 상처받았고, 지쳤으며 외로웠다. 그녀를 붙든 것은 아들이었고, 영혜였다. 그 둘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는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핑계 속에 자신을 가두고, 평범하다 주문을 외우며 살던 그녀의 삶에 영혜의 존재는 미친 사람과 보통 사람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들보다 낫다는 것이 어쩌면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걸 거부하는 영혜를 보면서 인혜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정면충돌한다. 늘 꿈꿔왔을지도 모르는 자유에 도달한 영혜가 부러웠던 건 아니었을까?
이 책에 나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하루 지난 지금 무섭다. 마치 공포소설을 읽은 듯이 이 책을 리뷰하는 내가 자신이 없다. 가장 우울할 때 읽었다. 그래서 더 몰입했고, 영혜라는 인물에 빠져버렸다.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 그녀였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안아주고 손잡아 주고 싶은 캐릭터! 그러나 실제로 옆에 있다면 나는 다가갔을까? 그것조차 모르겠다. 그녀가 채식을 선택했을 때까지는 옆에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계속해서 물어보았을 것 같다? 왜? 왜? 왜?라고 말이다. 진짜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이 책을 추천 여부는 말하지 않겠다. 추천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많은 사람이 읽었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지 책을 읽으면서 모든 사람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읽었으면 한다.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지 않다. 다 생각과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영혜의 한 부분을 이해한 것처럼 이해되는 부분은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런 작은 바람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