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문을 여는 글쓰기/의미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 드려야 한다.
이 말은 [데미안]에서 유명한 문구다. 이 문장이 내게 의미를 준 건 아주 어릴 적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다. 베이비붐세대인 우린 오전, 오후반이 나뉠 정도로 한 반의 인원수가 많았다. 주 교사 한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인원수로 부담임이 있을 정도였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학생에게 관심을 쏟기엔 역부족이었을 거다. 반에는 담임도 모르는 갈림이 있었고, 괴롭힘은 물론이며 혼자 떨어져 섞이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촌지가 버젓이 있던 세대였기에 부모가 학교에 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학생이 너무 잘해서 혹은 잘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은근히 학교에 부모가 오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에 대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그것은 암묵적으로 괴롭혀도 괜찮은 아이가 되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참 둔한 성격은 괴롭힘을 당해도 기억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아픈 기억은 거의 없다. 딱 하나 기억나는 일화는 책상에 그어진 줄이었다. 그 줄을 넘어 지우개가 넘어왔는데, 넘어간 부분만큼 그 친구가 칼로 잘라냈다. 그렇게 하고도 뭐가 서러운지 울어버렸다. 선생님은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새로운 지우개를 주었다. 문제의 지우개는 휴지통으로 갔다. 그때가 2학년이었는지 3학년 때였다. 그때는 정말 상처받았는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잦은 이사와 잦은 전학은 분위기 전환보다는 더 큰 외로움만 쌓을 뿐이었다.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 부모의 아이는 꼬리표가 되었다. 이는 교사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이라고 받았다는 듯이 암묵적인 괴롭힘이 나를 덮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보통의 아이가 되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조차 쉬운 게 아닌 그 시절, 처음으로 관심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곳이 교회였다.
교회를 처음 간 건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마지막 이사로 정착한 곳에서였으니 4학년, 5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유일하게 스트레스 해소는 걷는 거였는데, 집에서 버스노선으로 4 정거장을 지날 때쯤 찾은 한적한 교회였다. 예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줬다. 아무것도 없는 내게 성경책을 펼쳐주고, 찬송가를 빌려주었으며 낯선 환경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이름과 나이를 묻던 그들이 데려간 곳은 또래가 있는 어느 예배당이었다. 처음 왔다고 꼭 주목한 건 아니었지만, 조용한 친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자주 방문한 그곳에서 한 선생님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재라고 책이 즐비한 곳에서 서성거리던 내게 뭐든 보고 싶은 것을 보라고 흔쾌히 허락받았다. 거기서 저 문구를 보았다. 마치 운명처럼 본 저 글은 내 마음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세상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이구나.”
그때의 깨달음은 평생 나를 움직이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날 이후였다. 나는 나를 바꾸려 노력했다. 그 시작이 아마도 중학교 때 있었던 그 일일 것이다. 그때의 심정은 솔직히 정확하지 않다. 화가 났다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흰머리를 뽑아서 놀리던 친구에게 화가 난 건지 같이 웃어댄 모든 친구에게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다. 모두에게 짜증이 났을 수도 있고, 이런 상황이 화가 났을 수도 있다. 그냥 그 순간 묵은 감정들이 폭발했고,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매번 한 해가 끝나고 시작할 때면 이 글을 다시 읽는다. 나는 지금도 나를 막고 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혹시 알지 모르겠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계속 힘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힘들면 잠시 쉴 때도 있고, 가끔 부모나 먼저 태어난 병아리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말이다. 나에게 저 문장은 힘을 주었지만,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은 의미 위에 차곡차곡 쌓여 살아가는 지혜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