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그림 11 일차_입술과 코

2025년 06월 30일 월요일

by 그래

정말 마스터한 거 없이 하루가 열심히 가고 있었다. 드로잉북은 이미 한 권은 다 썼고, 두 번째 드로이북을 꺼냈다. 11시 30분 수업이지만, 교통수단이 열악한 곳이다 보니 10시 55분이면 항상 학원 앞에 도착했다. 처음엔 1층에서 앉아서 쉬었다. 더운 여름 땀도 식히고, 지독한 계단의 후유증을 잠시 쉬는 것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점차 그 시간은 짧아졌고, 시원한 학원 로비에 앉아 드로잉북을 펼쳤다.


연습할 때는 굳이 지우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에서 지우개가루가 무수히 많이 나왔다. 수업 시간이 다 됐다는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15분은 훌쩍 넘겼고, 그 때문에 지우개 가루를 꼼꼼하게 치울 시간이 부족했다. 학원 로비는 신규 학생들의 상담과 기존 학생들의 문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학원의 첫인상의 지우개 가루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연습할 때는 지우지 않고, 그 위에 덧대거나 혹은 다시 그렸다.


처음엔 그림에 몰두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낯선 학원이 적응해짐에 따라 단순 소음에 불가하던 대화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늦깎이 학생은 그림에 푹 빠져 시작했지만, 취업을 위하여 진학을 위하여 혹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상담을 신청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과제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이와 성별은 상관없이 모두가 돈을 벌고 싶어 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설레는 마음과 긴장된 마음을 동시에 안고 온 그들에게 깨끗한 책상을 주고 싶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학원 소개나 작은 신문 내용을 읽기를 바랐다. 낯선 곳에 뻘쭘함을 지우개 가루로 기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지우개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드로잉북 위에 쌓아두고 배운 걸 연습했다. 글 쓰던 집중력은 여기서도 발휘되었다. 옆에 누가 앉았다 일어나도 모를 만큼 집중하다 정신 차리면 수업 15분 전이었다.


어제도 밤새도록 눈을 그렸다. 오늘은 입술과 코였다. 1교시와 2교시로 이어진 시간 동안 코와 입을 그렸다. 역시 똥손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을 가르쳐주면 정말 고된 하루가 되지만, 그건 이제 갓 배우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듯했다. 같이 배우는 친구들은 모두 잘 그렸다. 어떤 그림이 실물이고, 사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부러움은 잠시, 나는 내 드로잉북에 집중했다.


코의 위치와 기본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한 뒤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알려주었다. 코 볼과 들어가고 나온 부분들을 너무도 쉽게 그리는 선생님을 보면서 초짜인 난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전혀 코처럼 보이지 않는 그림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수업 중에 그린 그림

처음에는 뭐 이 정도면 그릴 수 있겠다 자신한 것 같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양한 입 모양을 그리면서 재미도 있었다. 선과 점 하나로 웃는 것처럼 보였고, 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코를 그리면서 두상 그리기도 배웠다. 두상이 있는 그림은 확실히 보이는 것이 달랐다. 코의 위치는 선명했고, 두상이 얼마큼 보이느냐에 따라 표정은 다양해졌다.


이 수업도 나에게는 재밌었다. 물론 어려웠지만, 어려운 만큼 정복하는 재미가 있달까? 물론 변화에서 느끼는 쾌감이 짜릿했다. 평소 매일 보는 사람을 보면서 아, 표정이라는 것이 저렇게 바뀌는구나! 눈꼬리가 올라고 내려갈 때마다 지금 기분이 달랐구나! 그런 것들이 재밌었다.


남편은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는 내가 낯선지 얼굴을 붉혔다. 연애 이후 오랜만에 보는 부끄럼이었다.


나름의 자신감이 생겼을까? 두상을 전부 그려보고 싶었다.

20250630_1280_232243.jpg 과제

이 중에 그나마 닮았다고 한다면 중간에 남자다. 정면 얼굴은 아직 완벽한 비율을 못 찾았다. 가르쳐 주신 대로 열심히 그려도 이상하게 부족하거나 모잘랐다. 확실히 얼굴은 어렵다. 그나마 느낌은 비슷했다고 나를 위로하며 오늘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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