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퇴근길의 사고
2009년 봄. 나는 용마루 고개 꼭대기에 있던 사무실을 나와 잰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허기인지 메스꺼움인지 모를 불편함 때문에 얼른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대략 30분 정도. 운동삼아 늘 걸어다니는 길이라 눈감고도 갈 수 있었다.
서울대동문회관 건물 뒤쪽으로는 굴다리김치찌개집과 오래된 고기집들이 곧 몰려들 손님을 맞기 위해 문을 활짝 열고 채비 중이었다. 모퉁이 만두집 찜통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가고, 초록색 마을버스가 짧은 거리의 정류장에 서느라 멈추고 출발하고를 반복하고,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적색 고무 대야에 마늘을 까거나 나물을 다듬어서 팔던 할머니들도 퇴근 준비에 자리를 정돈하느라 부산했다.
다섯갈래로 길이 나는 복잡한 골목이었지만 복잡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전하기도 한 도로였다. 신호등 따위는 없는 폭이 좁은 그 도로를 반쯤 건넜을 때, 나는 맞은 편에서 달려와 좌회전을 받은 차에 치였다. 왼쪽 골반에 큰 충격을 느끼며 오른쪽으로 쓰러졌는데 순간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은 나를 위해 누군가가 다리 위에 신문지를 덮어놨다. 구급대원들과 불안한 눈빛의 운전자로 추정되는 여자, 한 켠에 세워진 구급차 위에 돌아가던 붉은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통증보다 절망감이 먼저느껴졌다. 정신이 돌아온 나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저 임신 중이에요.”
첫 임신 때 계류유산을 경험하고 전전긍긍해가며 두 번째 임신을 한지 11주차 되는 때였다. 그나마도 또 유산일 가능성이 높아 병가를 내고 한 달을 화장실 갈 때 빼고 누워만 지내다가 출근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절망감은 운전자에게로 옮아갔다. 그는 사색이 되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울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토해냈다. 나도 운전자도 아이가 잘못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급차에 실려 강북삼성병원으로 갔다가 응급실에 병상이 없어 중대용산병원으로 향했다. 누워서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커튼 하나를 두고 옆 병상에서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으로 오열하는 사람들의 흐느낌이 진동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기가 연옥인가, 지옥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옆 병상의 사망자와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뱃속의 태아를 생각하며 암담하고 아득해져갔다. 지옥처럼 괴로웠으나 겉으로는 멀쩡했다. 만화에서나 보던 고구마같은 혹이 머리에 이층탑처럼 솟은 것 말고는 의식도 돌아왔고, 장기에 손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산부인과 검진이 가장 먼저 행해졌다. 의사는 성의없는 태도로 기구에 젤을 발라 질 속을 헤집더니 애 이상 없어요. 라고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상하게 비현실적이고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임신 초기라 엑스레이를 찍을 수 없어 MRI를 찍었다. 쇄골이 부러져서 여러 조각이 났으나 입원해봤자 조치할 수 있는 게 없는 임산부라 팔을 몸에 고정시키고 내쫓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들면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자꾸 차에 치었다. 그리고 차가운 선고를 들었다. “유산입니다.”
며칠이 지나고 정기적으로 다니던 동네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아들을 군대보낸 지긋한 나이의 담당 선생님은 생김새와 목소리톤이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사무적인 말투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특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의 사고 이야기를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의 안위가 계속 걱정된다고 털어놓았을 때 선생님이 초음파를 보며 말했다.
“박호단씨, 걱정마세요. 폭풍우가 몰아쳐도 바닷속은 고요하듯이, 아이는 안전합니다.”
그 뒤로 악몽은 꾸지 않았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 열두살이 되었다. 내가 쓰러졌던 오거리 골목엔 나의 몸을 따라 분필로 그려넣은 현장확인용 표식이 남아있다 사라지고, 하얀 페인트가 몇 번 더 칠해지고, 신호등이 설치되었다. 그 자리에 서서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릴 때면 늘 생각한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바닷속은 고요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