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과 수요일의 풍경
수요일.
코로나의 유행 이후 일주일에 두 번, 우리집의 저녁 시간은 다른 날보다 좀 더 부산하다. 시작은 남편이 듣는 대학원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부터였다. 그가 6시 30분에 퇴근해서 7시에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녁을 먹고 늦지 않게 노트북 앞에 앉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어야 한다. 수업이 있는 수요일이면 남편은 6시 정각에 사무실을 나오면서 내게 전화를 건다. “오늘 수업있는 날이야.” 퇴근과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는 뜻이다. 나는 평소보다 부리나케 저녁을 지어 차려놓고, 퇴근한 남편이 수저를 놓고 수업을 위해 방으로 들어가면 커피를 내려 책상 위에 놓아준다.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 약 두 시간 반 동안 아이들을 조용히 하도록 건사하는 것도 내 몫이다.
월요일.
올해 9월부터는 나도 온라인 글쓰기 수업을 듣게 되어 월요일 저녁이 바빠졌다. 오후에 특별수업을 받는 초등생 아이를 데리고 집에서 차로 30분 떨어져있는 거리의 학교에 갔다가 막히는 강변북로를 뚫고 집에 돌아오면 5시 50분. 부랴부랴 저녁을 지어 식구들이 식사하는 것을 돕다보면 눈 깜짝할 사이 7시다. 식사 후 치우지 않고 수업을 들어가면 내가 방을 나오는 밤 10시까지도 먹다 남은 김치 그릇이 식탁 한가운데 남아있는 경험을 몇 번 한 터라, 수업 전에 설거지와 청소기 밀기까지 마치려면 마음이 몹시 급하다. 먹는 속도가 느린 둘째 아이를 채근하여 그릇을 비우게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평균 7시 25분이면 내가 수업 듣는 동안 아이들에게 해야할 그날의 숙제를 해두라고 당부하고 들어와 방문을 닫는다. 엄마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두었고, 말귀를 충분히 알아들을만한 나이의 초등생들이지만, 자꾸 들어와 말을 건다. 남편이 수업할 때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지난번 수업 중 발표가 있는 날은 아이들이 중간에 들어올까봐 문을 걸어잠궜다. 달그락달그락. 문고리를 몇 번 비틀다 포기하는 줄 알았는데, 둘째아이가 젓가락으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한창 내 글에 대한 합평 중이었는데, 문을 따고 들어온 아이 때문에 평하는 말씀들을 얼마간 놓쳤다. 아빠는 도대체 밖에서 뭐하니? 아이들은 아빠가 잠이 들어서 숙제검사를 받으러 들어왔다고 했다.
노동 아닌 노동
“똑같이 온라인 수업 듣는 날인데, 월요일과 수요일의 풍경이 왜 이렇게 달라? 응? 난 자기 수업 때 시간 맞춰서 저녁 차려주고, 커피까지 책상 앞에 대령하는데, 내 수업날엔 왜 내가 동동거리며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들어가느라 이렇게 안달복달해야해?”
수업 시작 십분 전, 나는 호통을 쳐보지만 남편은 크크크 웃으면서 아이쿠 그러네 하고 대답하며 소파에 파묻혀있다. 내 호통이 반 이상 농담인 것을 서로가 알기 때문이다. 월요일 저녁 7시 반에서 10시까지는 전업주부로서 내가 가장 바쁘게 근무할 시간이고, 주업무 시간에 내 일과 상관없는 다른 공부를 하겠다고 자리를 비우는 나를 위해 남편이 내 업무-식사준비, 설거지, 청소, 아이들 돌보기-를 도맡을 의무는 없는 것이다.
의무는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부부간의 정, 의리, 도의로 일주일에 한 번 도와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질문할 때, 다른 목소리는 또 대답한다. 네가 주로 하고 있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라고, 부탁만 하면 인정상 쉽게 대체해줄 수 있는 일, 누구나 할 수 있고 전문성 없는 일. 고된 소득활동을 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도 이미 할 수 있고, 병행하고 있는 일. 일이 아닌 일. 노동이 아닌 노동.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익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온라인 공간에서 전업주부는 주기적으로 끌려나와 뭇매를 맞는다. 주체적이지 못한 부류, 세금으로 받은 교육에 대한 댓가를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양심없는 부류, 구시대의 유물, 내 딸은 저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의 반면교사. 무심하게 지나치지 못하고 상처를 받고 다른 소리에 귀기울여보려 책을 뒤적인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나처럼 출산과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저자가 전업주부인 아이친구들의 엄마를 만나서 받은 첫인상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거나, 돈개념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적인 부류여서 그렇다는 부연설명을 한다. 지금 장난하나? 책을 덮었다.
내 노동의 현장을 존중해주시겠어요?
나를 둘러싼 안팎의 이러한 목소리들이 내 자존감의 범주를 좁혀가는 것과 비례하여, 노동의 범위는 계속 늘어난다. 시간과 육체를 좀 더 갈아넣기도 하지만, 감정노동이 차지하는 영역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둘 다 몹시 기분이 상해있지만 더 어린 가족구성원인 두 아이들의 감정과 일과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대로 보살펴야하는 것은 내 쪽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편의 누나는 우리집을 자주 방문하는데, 내가 청소기를 돌릴 때 우리집 소파에 앉아 있다가 청소기 끝이 자신의 발끝에 닿을라치면 발을 살짝 들어올리곤 했다. 나는 비스듬히 앉거나 누워있는 시누이의 발밑으로 청소기를 넣어 소파 밑의 먼지를 흡입해야하는데, 이럴 때 오만 생각이 든다.
그녀의 직업은 의사이다. 내가 그가 노동하는 진료실에 들어가서 옆에 누워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는 것처럼 언니, 여기는 현재 내 노동의 현장이니 존중하는 자세를 취해주시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은 전업주부의 기여도를 평가절하하는 사회구조의 문제인가? 그저 개인의 미숙함에 기인할 뿐인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에 대한 고발인가, 그저 남편과 시가 식구의 험담인가?
주된 노동의 현장이 거주지이고, 내가 제공하는 노동의 대상이 가족이라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사적이기만 한 노동은 모든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뭍과 물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구불구불한 강의 하류 같다. 분명 나는 놀고만 있지는 않은데, 내 노동의 결과는 시공간에 모래알처럼 흩뿌려져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생활하니 얼마나 천국이냐고. 하지만 이제 일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저 요즘 일해요.
예전부터 해왔어요.
논 적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