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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이진 Aug 30. 2021

제주도민 6개월 차 초등교사

"The Road not Taken"

아주 오랜만에 문학적인 질문을 하나 받았다.

"어떤 시를 가장 좋아해?"

나는 대답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시에 자주 감동받는 편은 아니지만 처음 '가지 않은 길'을 읽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어린 시절인 것으로 기억한다.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


잠이 오지 않는 밤, 갑자기 그 대화가 생각이 났고 시를 다시 찾아 읽었다. 마지막 구절에서 내 눈가는 촉촉해졌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정말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제주로 이주한 지 6개월.

나도 내가 제주에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2년 전, 제주도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텝으로 한달살이를 했고 그때의 좋은 기억이 자꾸 나를 제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제주의 한 초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냥 제주가 좋으니까 일단 일 년을 살아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이곳에서의 지금 삶이 참 행복하다.

아니, 인생이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지만 행복한 순간들이 평범한 순간보다 더 많다면 내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 4개월쯤 지났을 무렵에, 나는 일 년 더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걸어가면 볼 수 있는 해변.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나타나는 마법 같은 노을. (아, 어떻게 매일 이토록 아름다울까!)

노을이 지면 한치 배들로 불이 켜지는 밤바다.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한라산의 모습.

귀여운 동글동글 오름들.

그곳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노루, 토끼, 이름 모를 새들.

선명하게 보이는 별자리.

드라이브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들.

다양하고 예쁜 신상 카페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 


제주에 오기 전 많은 이들이 대신 걱정해주었던 제주 텃새는 나를 완벽히 비껴갔고, 우리 착한 동료 선생님들은 제주 초당 옥수수, 파김치, 물김치, 제주 알감자, 미니 단호박, 기프티콘 등을 종종 챙겨주시며 나의 살을 찌워주셨다. 그리고 나는 제주 사투리에 물들어가고 있다. 처음에 '마씸'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소규모의 문화충격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제주사투리를 썼는데도 선생님들이 내가 사투리를 쓴지도 모르고 넘어갈 때 내적 쾌감을 느낀다! 



"방학 잘 보낸?" (방학 잘 보냈어?) ― 제주 사투리의 특징 중 하나는 어미를 많이 줄인다. 참 경제적이다.

개학하자마자 묻는 교감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자랑스럽게 답했다.

"저보다 제주의 여름을 잘 즐긴 사람은 없을걸요?"


경기도에서 정교사로 근무할 때 나는 모든 연수를 피해 다녔다. 방학이면 해외여행, 봉사를 다니기 바빴다. 억지로 시키는 것은 정말 1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재미있는 연수들이 너무 많았다. 코로나 때문에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스킨스쿠버 연수는 하지 못했지만 대신 승마 연수, 드로잉 연수, 윈드서핑 연수를 차례로 신청했다. 그리고 육지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야, 제주도에는 승마 연수도 있어!"

"헐, 대박. 그런 연수가 있어?"

"게다가 무료야."

"진짜? 와 진짜 제주도 클라스 장난 아니네."


8일 동안 진행된 승마 연수는 기껏해야 관광객용 승마 체험이 전부였던 나에게 재밌기만 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값진 경험이었다. 이제 겨우 경속보를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자마자 연수는 끝났지만 마음만 잘 먹는다면 취미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골프, 농구, 배드민턴 등 체육전담교사를 위한 패키지 연수도 신청하고 싶었지만 주변 선생님들의 만류로 신청하지 않았다. 나를 말려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너무 빡빡한 스케줄로 하마터면 방학 동안 본가에도 다녀오지 못할 뻔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동료 선생님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언니, 제주는 가을이 제일 예뻐요. 가을 되면 우리 많이 놀러 다녀요."

물론 나는 지난 주말도 비자림 트레킹과 월정리에 스노클링까지 다녀왔지만, 제주도가 고향인 찐 제주도민의 말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제주의 가을이 벌써 기대된다.




숲 속에 잘 닦인 큰길과 

아무도 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길이 있었고,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택했어.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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