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지 않고 글을 쓸 수는 없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속 한 줄

by 나작

죽기 전에 나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글을 한편 쓰고 싶다. 헤르만 헤세처럼, 찰스디킨스처럼, 헤밍웨이처럼 위대한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 이건 진짜 내가 쓴 글이다'하며 만족할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하루의 끝에 뭐라도 읽고, 써보려고 하는 것으로 되는 걸까.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가면 또 다른 시간이 너무 빨리 찾아왔고, 이번 주에 생기는 일들이 지난주의 어설픈 계획들을 망쳐 버리고 다음 주는 또 새로운 일들이 생겼다. 이런 상황의 힘에 자신이 굴복했음을, 그리고 그런 굴복에 대한 동요가 없진 않았지만 지속적이거나 강도를 점점 더한 저항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굴복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두 도시 이야기' 속 찰스 다네이는 자신이 속한 프랑스 귀족가문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으로 와 아이들을 가르치며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루시와 결혼 후 행복한 생활을 하지만, 프랑스에 남아 가문의 일을 대신해주던 하인 가벨의 구금소식에 흔들리고 만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모른척하며 "행동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망설여온 날들을 떠올린다.


내가 해왔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덜컹이는 오프로드를 따라 들어간 마을에서 온화한 사람들을 만나고, 낡은 나무집의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가 예쁘게 썬 오이를 대접받을 때 내가 본 삶의 진짜 얼굴들을 잊고 외면해 왔다. 나를 받아주었던 사람들, 나를 구해주었던 사람들이다.


내 속은 텅 비어 있다. 잃어버렸다. 혹은 버렸다. 나는 태연하게 하루를 그다음 날을 산다.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공부를 봐준다. 책상에 앉아 글을 써본다. 비어있는 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생활에 굴복한 시간들은 삶이 아니다. 뭘 쓰고 싶은 걸까, 쓰고 싶기는 한 걸까.


삶을 살지 않고 글을 쓸 수는 없다. 진심의 한 부분을 뭉텅 도려낸 글은 어떻게 써도,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다. 나에게 조차도. 그 시절을 지우고, 그 사람들을 모른척하고, 그때의 나를 숨기고, 아무리 많은 글을 써도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에드레몽드를 지운 찰스 다네이는 누구였을까.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프랑스로 돌아간다. 에드레몽드라는 이름의 책임을 온몸으로 견디어내고 돌아온 찰스 다네이만이 그로서 존재할 수 있다.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도려내고 지워버린, 나의 삶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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