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에 엎드려 있던 나는 ‘딩동’ 울리는 벨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곱슬머리에 베이지색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안경 낀 여자가 바구니를 집어 들고 편의점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한번 더 딩동. 검은 모자에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남자도 바구니를 집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포스기 앞에 따끔거리는 눈을 꿈뻑이며 섰다. 검은색 모자가 먼저 다가왔다. 바구니에는 몬스터 2개가 들어 있었다. 곱슬머리 남자와 긴 머리 여자는 아직 주류 냉장고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유 모를 어깨와 허리의 근육통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피곤했다. 목 언저리의 뻐근함도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머리도 쿡쿡 쑤시는 것 같다. 수시로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풀어보려 했지만 별 효과가 없다. 어제도 그다지 컨디션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저녁 무렵에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이의 공부를 봐주는 대신 유튜브를 틀어주고 소파에 웅크리고 삼십 분 정도 눈을 붙였지만, 결국 쏟아지는 졸음에 일찍 잠이 들었었다. ‘오늘은 일찍 자니까 내일은 좀 일찍 일어날 수 있겠지. 여섯 시쯤 일어나서 글을 좀 써야겠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열두 시간 가까이 잤는데도 눈꺼풀이 무겁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오늘도 망했구나. 부스스 일어나 간신히 세수와 양치를 했다.
곱슬머리 남자와 긴 머리 여자는 맥주 두 캔과 몬스터 두 캔, 그리고 얼음 한 봉지가 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봉투 필요하신가요?” 나도 모르게 상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이 명랑한 기운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봉투에 맥주와 몬스터와 얼음을 넣어 건네고 나니, 자주 오는 외국인 손님이 스마트폰을 불쑥 들이민다. 구글 번역기에 “ATM에 카드를 두고 갔어요.”라고 쓰여있다. “카드를 안 뽑고 그냥 갔어요?” 과장된 손짓과 함께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곧바로 ATM기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 사건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곤란해했을 텐데 내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손님이 뜸한 시간에 정산금을 입금하고 있을 때, 아이스커피를 사러 온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나갔다. 그 후로 카드의 행방이 묘연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CCTV를 수십 번 돌려본 후에야, 기계에서 카드를 뽑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CCTV 속의 나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태연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ATM이 회수되지 않은 카드를 보관하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았다. 덕분에 나는 오늘 곤란한 처지에 놓인 손님의 문의를 명쾌하게 해결해 줄 수 있으니 다행이지 뭔가.
“현금 수거하시는 분들이 이미 카드를 가져가셨네요.” ATM 회사의 고객센터에서는 손님의 신상과 집주소를 물었다. 그는 이름, 전화번호, 집주소라는 단어는 알아들었으나, 다른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구글 번역기를 켜고 “어느 나라?”인지 물었다.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대답 후에 ”러시아어로”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집으로 보내준대요” 그는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뒤돌아 나갔다.
저 사람, 키르기스스탄 사람이었구나. 매일 와서 담배와 맥주를 사가는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어제 키르기스스탄에서 살고 있는 옛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었는데. 캄보디아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였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다며 연락이 왔었다. 반갑게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지만 만나자는 말은 없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때 나는 전문가님이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시 엎드렸다. 어제 머리카락 염색을 하느라 불편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그저께 갑자기 윗몸일으키기를 30번 정도 했기 때문일까? 매번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야지, 하고 결심하면 다음날 몸이 아팠다. 감기몸살, 소화불량, 또는 오늘 같은 극심한 피로와 두통. 딩동. 벨소리가 울리고, 머릿속도 울린다. 딩동. 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