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은 금물이다
어린 왕자가 사는 작은 별에는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이 있다. 그중에서 바오밥나무 씨앗은 치명적이다. 다른 떨기나무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 작은 바오밥나무가 어느새 쑥쑥 자라 별을 뒤덮어버릴지 모르니, 매일매일 꼼꼼히 별을 청소해야 한다. 게으름은 금물이다.
"그건 규율의 문제야." 나중에 어린 왕자는 내게 말했다. "아침에 세수를 마치면 별도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닦아줘야 해. 어린 바오밥 나무는 장미나무와 비슷하게 생겼거든. 바오밥나무인게 구분이 되면 규칙적으로 뽑아줘야 해. 무척 지루해도 쉬운 작업이야.
아침에 일어나보니 엄마가 계란찜을 해놨다. 분홍색 옛날 소시지도 구워져 있다. 옛날 소시지를 좋아하는 건 가족 중에 나뿐이다. 어제저녁에 남편과 딸이 마트에 갔을 때 사 왔다고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거라서 샀어." 나는 건성으로 그러냐고 대답했다.
나는 분홍색 옛날 소시지를 좋아하지만, 사지는 않는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잘 구워진 소시지가 식탁 위에 올라왔을 때, 와! 분홍색 소시지다! 하고 환호할 사람이 나 한 명이라면 맥이 빠진다. 내 소시지를 보며 "맛없어서 안 먹어."라고 하는 식구들 사이에서 외롭게 소시지를 먹고 싶지 않다. 심지어 분홍색 옛날 소시지는 커다란 방망이 같아서 혼자서 먹기엔 부담스럽다. 나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소시지를 집어먹었다.
어제 아침엔 괜한 일로 식구들에게 버럭 화를 냈었다. 이삿짐을 모두 가게의 남는 공간에 쌓아놓고 친정집에 머무르면서, 각자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식구들에게 불쑥불쑥 내 공간과 내 시간을 침범당하는 통에 모든 계획이 어영부영 흐트러져버린 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차분히 글을 쓰고 싶을 때, 더 일찍 일어나는 엄마의 텔레비전 뉴스 공격이 시작된다. 아이를 재우고 조용히 하루를 기록하고 싶을 때, 남편이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다. 몸은 나날이 피로해지고 정신은 갈수록 갈피를 잡지 못하던 것이 아이의 사소한 잘못으로 폭발해 버렸다.
나를 위해 일부러 사 왔다는 분홍색 소시지를 내가 그다지 반기지 않아서인지, 남편과 딸이 괜히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분주하게 등원준비를 하는 동안은 소리 지르고 에너지를 쓰기 마련인데, 생각이 그다음 시공간으로 미리 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 양치를 해주는 동안 옷 입힐 것에, 옷 입히는 동안 머리 묶어줄 것에, 머리 묶는 동안 어린이집에 도착할 시간에 마음이 온통 빼앗겨 있으면 아이의 미적거림과 빈둥거림을 참을 수 없어진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일어나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늦은 아침을 맞이해 버린 날엔 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그런 날들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몇 달 전부터 가려고 마음먹었던 독립서점에 갔다. 책과 커피와 아기자기한 문구류가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내 공간으로 느껴진다. 책장마다 꽂힌 책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내가 읽고 싶어 했던 책, 새롭게 흥미가 가는 책, 서점지기가 추천하는 책 등을 찾아본다. 그중에서 마음이 끌리는 책 한 권을 샀다. 얇은 두께와 연두색 하드커버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다. 서점 주인이 첫 손님이라고 커피를 내려주었다. 서점 한편에 앉아 오래간만에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창가 테라스를 둘러싼 알록달록한 가을 이파리들을 바라보며, 분홍색 소시지를 사 온 남편과 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었던가, 되짚어본다. 나의 별에 자라난 바오밥나무를 청소하기에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