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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Oct 06. 2020

(일상) 역지사지 여행

감천 문화마을


2020. 10. 02.  감천 문화마을에서 역지사지 여행





내 생애 이런 명절이 또 있을까 싶다.


코로나로 발이 묶여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 있었는데 그렇게 욕을 퍼부어댔던 코로나 덕에 황금 같은 휴가를 얻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딜 간다거나, 특별히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휴일 같은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화요일 저녁부터 퇴근을 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설레는 마음에 술꾼들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듯 늦은 커피도 서슴지 않고 마셨다. 잠이 안 와서 밤을 꼴딱 새어도 5일이나 줄지어 늘어선 연휴가 있으니 '까짓것 안 자면 어때?' 하는 용감무쌍한 객기가 마구 용솟음친다.





연휴 동안 줄곧 영화를 봤다. 요즘 들어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 그것이다. 운동을 겸해서 극장까지 걸어가다 보니 그동안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던 극장이 어느새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세상사 참! 길들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하루는 짬을 내어 한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친구와 만나면 까페를 찾기보다는 걸을 수 있는 곳을 택한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슬금슬금 쳐들어오는 나잇살을 봉쇄하기 위한 일환이다. 공원을 찾거나 등산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갈맷길을 걷기도 한다. 운동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만났다가 헤어질 때 약속한 감천 문화마을을 찾았다. 한 번 가봐야지 했는데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가 길동무가 있으니 쉽게 마음이 먹어진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꼬불꼬불한 오르막을 올랐다. 오르다 보니 작은 버스 안은 어느새 승객들로 가득 찼다. 정류장을 놓칠까 봐 하나, 둘 세어 가며 문화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우리처럼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있다. 오랜만에 여행 온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낯선 곳의 설렘인가?

마을 입구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도 있다. 추석 연휴에도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다. 여행 갈 때마다 한 두 개씩 사던 마그네틱 2개를 샀다. 안내소가 있어 들어가 보니 마을 지도를 2천 원에 팔고 있다. 한 장을 살까 했더니 친구가 극구 말린다.





"입 있겠다 말로 물어보면 되지, 뭐하러 지도를 사?"
"그럴까? 낯선 곳에 여행 가면 지도부터 챙기는 게 버릇이 돼서....."

그랬다. 낯선 곳에서 지도는 때때로 든든한 지원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안내소에서 지도나 정보지를 챙겨 대략 그곳을 미리 훑어보곤 했다. 해외여행을 가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용을 쓴데 반해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돌아 나오면 되고, 갔던 길이 또 나오면 조금 더 걸어도 상관없다. 잘 모르면 내가 잘하는 모국어로 물어보면 되고, 그래도 모르면 가다가 또 물어보면 된다. 못 알아듣는 단어가 있을까 봐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 있어서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내 나라 말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생각을 조이고 있던 머릿속의 붕대가 한꺼번에 후루룩 풀어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감천문화마을의 문패 같은 물고기 장식이 벽을 따라 길게 이어져있다. 나무에 형형색색으로 갖은 문양을 칠한 것인데 다채로운 색감이 예쁘게 잘 어우러져 있다.


문득 칠레 발파라이소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포토존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남긴다. 이번에는 나도 길동무가 있어 사진 몇 장을 남겨본다.





물고기 조형물을 시작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 안쪽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는 곳이라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빤히 나 있는 길을 가다 보니 마을 밖으로 나오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추석이라 가게가 다 열리지 않은 것인지 그다지 눈을 끌만한 곳이 없다. 단지 색색으로 집을 칠한 것이 전부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위로 올라가니 작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 집 저 집 색색으로 칠을 했지만 조심스러운 색의 선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를 단박에 홀리던 발파라이소의 벽화가 맑은 가을 하늘에 아른거린다.

'그래,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렸다가 그 위에 다시 칠할 수 있는 작은 캔버스도 아니고......'

나 역시 이번에 거실과 방을 페인트 칠하면서 단순한 흰색에서 벗어나 다른 색을 입혀보기로 마음먹었지만 색상 선택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하얀 도화지에 자신 있는 색감으로 과감하게 휘젓는 모험 같은 붓질이 아쉬운 건 끝내 잠재우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출구(?)로 나온 곳은 마을 입구에서 한참 내려온 아랫녘이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4시를 지나고 있지만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가 않아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큰 도로로 나왔으나 어느 방향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친구가 물어보겠다며 근처 가게 상인에게 물어서 정답을 가져온다. 우리가 가던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서 차를 타라고 한다. 뿌듯한(?) 순간이다.

길을 몰라도 두렵지 않다. 아마도 내 집 안마당 같아서 일 것이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길 위에서 맛보는 평안함인지 동네방네 떠들며 자랑하고 싶어 진다.





알려준 반대방향으로 올라 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고맙게도 버스 안에는 빈자리가 그득하다. 둘이 나란히 앉았다.  바로 앞에 금발머리 아가씨 두 명이 앉는다. 학생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낯선 곳에서 느끼는 여행객들의 멈칫거림이 그녀들의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이거나 직장인인 것 같다.

해외에 나가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혹시라도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칠까 봐 노선도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승객에게 물어서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 운전했을 때 누가 떼어 가기라도 할까 봐 핸들을 힘껏 쥐고 있었던 것처럼, 혹시라도 누가 나 몰래 노선을 바꿀까 봐 눈으로 노선도를 사수했던 내 모습에 반해 그녀들의 뒷모습은 익숙한 길인지 타국에서도 참 편안해 보인다.





그녀들이 초행길의 여행자였다면 한껏 으스대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괜히 심통이다. 내릴 정류장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바심치는 나와 반대로 평안해 보이던 현지인들의 느긋함을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나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그런 느긋함을 그녀들도 보고 부러워해야 하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나잇값도 못하고 철딱서니 없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남편과 외식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외국인 여행객이 박물관 위치를 물었다. 역지사지를 생각하며 있는 대로 최대한 상세하고도 친절한 설명을 쏟아부었다.

여행할 때마다 그동안 나에게 길 안내를 해주었던 숱한 외국 현지인들에게 한꺼번에 은혜라도 갚을 듯 그녀가 잘 찾을 수 있도록 쉽게 쉽게 알려 주었다.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도  방향을 잘 몰라서 뱅글뱅글 주변만 맴돌았던 그 막막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할 만큼 체력이 안 되면 그때 해야지 하고 국내여행은 잠시 뒤로 밀쳐 두고 있었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간간이 당일치기나 1박 2일로 국내 여행을 했으나 그것도 2년 전에 갔던 군산이 마지막이다.

코로나 덕분에 여행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모처럼 감천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했던 해외여행에서 경험하지 못한 푸근함이 오히려 어색하면서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길을 잘 못 들어도 불안하지 않고, 길을 몰라도 모국어로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낯선 곳을 갈 때마다 느꼈던 긴장 없이 모처럼 홀가분한 나들이를 했다. 물론 그 긴장이 성취감으로 이어질 때는 매력 있는 거래로 여겨지지만, 오래 머문 자리가 주는 익숙함이 얼마나 달콤한 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하루였다.  





그동안 너무 전투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 지 생각하게 한다. 의미가 있어야 중요하다고 여겼고, 차오르는 성취감이 있어야 가치 있다고 여겼다. 그 날이 그 날 같은 익숙한 일상에 안주하는 것은 게으른 자의 마지막 핑계라고 여겼다.

길 위에 서 있는 우리는 누구나 방향을 잃을 수도 있고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나는 오늘 또 다른 의미의 길을 잃었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또 다른 길을 알아간다.

익숙한 편안함도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하고, 종내 우리가 찾아드는 여행의 종착지도 어쩌면 그 편안한 익숙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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