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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Green Grads Oct 03. 2021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Date with a Professor

다트머스에는 Take a Professor to Lunch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학생 주도로 교수님과 점심식사를 함께해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한 학기에 한번, 사전 신청을 통해 Pine이라는 레스토랑에서 평일 아침 혹은 점심에 쓸 수 있는 50달러의 바우처를 받을 수 있다. 프로그램의 의미는 교수님과 1:1로 밥을 먹으며 강의실 밖에서도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이지만, 1:1이 부담스러운 학생들을 위해 최대 1:3까지 가능하도록 만들어두었다.


꼭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학생들과 강의실 밖 좀 더 단란한 분위기에서 교류하기를 원하는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직접 집에 초대해서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기도 하고, 캠퍼스 주변 카페나 식당에 모여서 수업 시간에는 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한다. 


내분비학(Endocrinology) 수업을 가르쳤던 위터스(Witters) 박사님은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열정적이기로 명성이 자자한 교수님이었는데, 심지어 매주 금요일 신청을 받아 제비 뽑기로 뽑힌 대여섯 명의 학생들에게 해노버에서는 나름대로 가장 근사한 레스토랑 중 하나인 Pine에서 점심을 사주셨다. 감사하게도 Take a Professor to Lunch 프로그램으로 가능한 최대 인원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에게 사비를 털어서 점심을 사주시는 것이다.


Pine에서 공짜 점심이라니! Pine은 Hanover Inn이라는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꽤 비싼 편인지라 나는 아직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학기 초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던 나는 학기 시작 첫 주부터 당차게 신청을 했고 바로 당첨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주에는 뭔가 부담스러워서 신청한 사람이 많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교수님께서는 점심을 먹으러 올 때는 딱 두 가지만 준비해오면 된다고 하셨다. 첫째, 맛있는 음식을 가득 먹을 수 있는 우주와 같은 위장. 둘째, 드넓은 내분비학의 세계에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 한 가지. 첫 번째라면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바쁜 일상에 치인 나는 두 번째를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그렇게 금요일 아침 수업이 끝났고, 나는 드디어 주말이라는 행복감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안고 Pine으로 향했다. 


안내된 자리에는 낯익은 학우들과 교수님이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있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접시에 생굴 요리가 놓여있었다. 교수님은 항상 이렇게 학생들과 생굴을 먹는 것이 자신만의 전통이라고 하셨는데 미국 아이들은 익히지 않은 해산물을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코를 막고 먹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고 먹기도 하고, 무슨 의식을 치르듯 한 사람씩 돌아가며 생굴을 맛보며 그 물컹물컹하고 괴상한 맛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대담하게 한입에 커다란 생굴을 털어놓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굴쯤이야!’ 


그 여유는 오래지 않아 너덜너덜 휴지조각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한창 가벼운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던 교수님께서 갑자기 자세를 고치시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자, 그럼 각자 준비해온 이야기를 해볼까요?” 하며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꿰뚫어보듯 돌아보시는 것이다. 나는 완전히 빈 손이었다. 나에게 준비된 것이라고는 두둑한 식욕 뿐이었는데…! 순간 맛있게 먹던 치킨 샌드위치에서 지우개 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망했다.’ 교수님 특유의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빛 때문인지 나는 속마음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아이들은, 예상했다는 듯 돌아가면서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떤 호르몬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라든지, 최근에 밝혀진 새로운 사실이라든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틈도 없었지만 다들 하나같이 박식하고 멋진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하나, 먹는 것이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열심히 먹었다. 어찌나 열심히 먹었던지 교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준비해왔냐고 물어보시며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입에 한 가득 치킨 샌드위치를 물고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고, 그 덕에 잠시나마 고문의 시간이 연기되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조차도 기억에서 지워버린 관계로 생략하겠다. 다만 교훈이 있다면, 아무리 맛있는 밥도 편한 사람이랑 같이 먹어야 맛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는 것이다.


Written by Song He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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