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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라고 불립니다 Aug 25. 2021

독일에서의 시작을 추억해보다

나의 첫 독일 도시, 로스톡(Rostock) 

어느 오후,

10분 남짓 거리의 언덕 위로 갈 일이 생겼다.

버스로는 노선이

맞지 않아 환승을 해야 하는데  

돌아서 가는 길이 족히 30분은 더 걸릴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30도.

덥다. 에어컨이 안 나오는 구형 버스라도 걸리면,

버스 안은 사우나를  방불케 정도일 것이다.

독일도 많이 더워져서 요즘은 버스가 에어컨이 나오는 신형으로 교체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아직 다는 아니다. 어쩌다 구형 버스가 걸릴 수도 있다.

이런 날, 나의 선택은  전동 킥보드 쉐어다.

 가로수가 촘촘히 많은 길을 킥보드로 가면

그늘 길을 가게 되고,  빠르게 달리니 시원한 바람도 맞는다.

빠르고 편하고 시원하고.


앱을 열어 주변 어디에 전동 킥보드가 있는지 본다.

다행히 우리 집 근처에 여러 대가 있다.

참 좋은 세상... 한글로 나온다.

(내가 처음 온 2000년,  나 때는 말이지,

사전을 들고 녔지)

아참, 운전면허증을 지참해야지! 

지갑 없이 나가려고, 지갑 속에 있던 운전면허증을 꺼내 핸드폰 케이스에 넣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운전면허증에 눈길이 갔다.  

그때, 운전면허증에서 눈에 들어온 글자 'Rostock'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도시 이름이자,

나의 독일살이의 첫 도시다.  


로스톡,  이름만 떠올려도 그립다...는 마음이 든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비하면 로스톡은 환경이 열악했고, 아름답게 꾸며진 도시는 아니었다. 

구 동독지역이라 그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는 여러 환경들이 구 서독의 1960년대와 다르지 않다고들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기억에는 감정의 플러스알파의 요인이 깃든다. 좋은 사람들과의 좋은 시간들이 주변 환경에 상관없이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로 인해 생각할 때마다 '참 좋았다'하고 미소 짓게 하니 말이다.


왜, 로스톡이야?

대표사진+사진 Wikipedia

로스톡은, Mecklenburg Vorpommern이라는 주 북부의 항구도시이다.

부산에서 오래 살았던 나는, 일에도 바다가 있는 도시에 산다는 게 참 좋았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지만, 독일은 삼면이 육지다.  그렇기에 독일에서 바다가 있는 도시에 산다는 건 조금은 특별한 경험인 셈이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도 로스톡에 사는 내내 바다를 참 잘 누리고 살았다.

2000년의 로스톡은 옛 동독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옛 서독 지역에 살던 지인들은 우리의 정착에 대해 근심 어린 걱정의 말들을 많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왜 하필 로스톡이냐고, 그 말을 가장 많이 들은 것 같다.

나는 2000년 여름에 결혼을 해서, 결혼식 3일 만에 독일로 왔다. 성악이 전공인 남편은 한해 일찍 베를린에 와서 독일 전역에서 음대 시험을 봤는데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이 온 게 로스톡 음대였다. 남편은 얼른 결혼을 하고 나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장 먼저 합격통지가 온 로스톡 음대에 등록을 했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갈 때 지인들은 다들 걱정을 하셨단다.

통독한 지 10년이 되었던 때였지만, 옛 동독 지역에서는 신나치들이 많았고 그중에도 로스톡은 주민의 60프로가 신나치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로스톡 외곽의 외국인들이 주로 살던 한 아파트에 신나치들이 방화를 해서 많은 사상자를 낸 지 몇 해 되지 않던 때여서 외국인들이 살면 위험하다는 인식이 만연한 때였다.  

그러나, 나는 신혼.

그맘때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으리...'님과 함께라면'아니던가.

그리고 나의 로스톡에서의 날들은 눈이 부시게 맑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로스톡의 바다 Warnemünde - Wikipedia
Rostock-Wikipedia

     2000년 초반의 로스톡 사진


바닷가라서  가장 좋았던 것은,

매일 새벽마다 싱싱한 생선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 Warnemünde-hof.de

내가 사러 갈 당시만 해도 작은 규모의 배들이 잡아온 생선들은 배 위에서도 팔기도 하는 좀 더 소규모의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각각의 배들이 그날 새벽에 잡은 생선들을 직거래로 팔았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많은 건 대구와 광어였고

농어 가자미 청어도 있었다. 물론 생선 이름은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로스톡에 살다 보니 광어회 정도는 뜰 수 있게 되었다. 새벽에 광어를 사서 집으로 오면 아직도 살아서 펄떡거렸다.

자연산 광어가 킬로에 10마르크(5유로=약 7천 원) 정도 한 것이 생각이 난다.  팔뚝만 한 연어 한 마리도

30마르크였으니(약 2만 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유학생이라도 어쩌다 한 번씩은 연어회 광어회로 파티를 함직했다.

어느 날, 대구가 있으니 명란같은 알도 있겠다 싶어서 물어봤다.

그러자 반색을 하며 그 앞의 냉장고에서 한 짝을 가져오셨다. 킬로에 2천 원 정도를 달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너무 싸서 5킬로그램을 사 와 한동안 내내  온 동네가  

알탕을 해 먹던 생각도 난다.

독일 사람들은 알을 주로 훈제로 해 먹는데, 퍽퍽해서 별로 맛은 없고 찾는 사람도 없어서 아마도 골칫덩어리였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알 사는 건 내가 처음으로 텄는데(?) 그 후로는 한국 사람들이 그들의 골칫거리를 많이 해결해주었다.

나중에는 가격이 좀 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좀 더 생선을 열심히 사 먹었어야 했다. 그 후로는 내내 내륙 지방에서만 살았기에 살아있는 싱싱한 생선은 구경하지 못했다. 냉동되어 파는 생선들을 볼 때마다 자주 로스톡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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