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생리 후 일주일은 임신이 안 되는 기간이니, 피임기구를 아끼라는 친한 언니의 충고를 잘 들은 탓이라고 해야 할까(그 후로 그 언니는 큰아들의 탄생은 언니의 공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어릴 때, 나는 멀미가 심했다. 늘 지방에서 살던 우리가 명절이 되면 서울로 역귀향을 하곤 했는데,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던 그 장면이 어쩌다 속이 안 좋은 날이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래서 나는 휴게소의 핫도그를 먹어보는 것이 꿈이었다.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꿈의 핫도그...
엄마가 입덧이 심했다고 들었긴 했지만, 입덧이란 것이 이 정도 괴로운 것일 줄 몰랐다. 어린 시절 그토록 괴로웠던 멀미가 차를 타지도 않고 가만히 있어도 계속되는 것이라니. 이런 입덧이 임신 5주부터 5개월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입덧이 사라지고 난 후부터는 엄청난 먹부림이 시작되긴 했지만 말이다.
입덧할 때는 신 게 먹고 싶다더니 나는 신 건 입에 대기도 싫었다. 생각만 해도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비빔냉면이 먹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음식을 접하기가 어려운 때라서 비빔냉면을 먹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임신에 공을 세운(?) 그 친한 언니가 어렵게 냉면재료를 구해와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하는 나를 위해 우리 집까지 와서 해줬던 생각이 나서 아직까지 고마운 마음이 있다.
속이 비면 입덧이 더 밀려와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버터쿠키를 집어먹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슈퍼에서 보면 생각이 나는 버터쿠키.
입덧기간의 나의 양식이었던 버터쿠키
그리고 조금 움직일 수 있을 무렵엔 배가 고프면 Nordsee라는 생선구이전문점에 가서 사이드 메뉴인 버터 감자볶음을 먹었다. 생선은 냄새 때문에 못 먹겠고, 사이드로 고를 수 있는 감자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밥 냄새도 맡기 싫고 평소에는 싫어하던 감자요리만 당겼는데, 생각해보면 생선 요릿집에서 2,3천 원짜리 감자볶음만 따로 시켜먹는 아시아 여자, 참 불쌍하게 보였을 수 있겠다 싶다. 지금처럼 독일어를 하는 때였다면 입덧 때문에 감자만 겨우 넘어가.라는 말을 직원들에게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럴 생각도 못 했다.
노스트제의 사이드메뉴 버터감자복음
고3이었을 때, 세상의 모든 대학생들이 위대해 보이던 때가 있었다. 만삭이 되어 출산의 두려움이 몰려왔을 때,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위대해 보였다. 길거리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 특히 옆에 작은 아이가 쫄랑거리며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 엄마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의 첫 출산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예정일 2주가 넘도록 소식이 없었고 2주가 지나 양수가 먼저 터졌고 3일을 병원에서 진통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내가 만약 조선시대에 출산을 했다면, 출산을 위해 들어간 방 앞 디딤돌에 아기 낳고 살아서 신고 나오라고 돌려 놓인 고무신을 신고 나오지 못하는 산모가 되었을 것이다.
큰아들은 3일의 진통 끝에 3.95KG로 태어났다. 내가 아기를 낳은 베를린의 산부인과 병원은 작은 자연주의 병원이었는데, 어떻게든 자연분만으로 낳게 하려고 낮에는 유도분만으로 밤에는 잠을 재우며 3일 밤낮을 진통을 시켰다. 지금 같으면야 괜찮으니 제왕 절개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겠건만 그때는 뭔지 몰라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했다. 넓은 분만실에서 자고 먹으며 우여곡절 끝에 자연분만을 성공했다.
그 병원에서 우리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유명인이었다. 온 병원에 슈퍼베이비를 보러 신생아실 앞에 모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아기들이 보통 2KG 정도로 태어나니, 거의 2배인 3.95KG의 아기는 가히 슈퍼베이비라고 할 만했다. 동양사람은 나 하나였으니 내가 아기 보러 갈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는 슈퍼베이비 슈퍼베이비 했다.
병원은 보통 2인실인데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5일) 내 옆의 침대는 3명이 바뀌었다. 그중에 첫 번째 산모가 기억에 남는데 오전에 아기를 낳은 내 옆 산모는 그날 저녁에 아기바구니를 직접 들고 집으로 갔다. 그것도 오후에 집에 가려고 했는데, 의사가 서류를 늦게 떼어주었다며 조금은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인형 놀이하는 것 같은 작은 아기바구니에 작은 인형 같던 아기를 넣어 들고는, 기진맥진해있는 나를 보며 잘 있어! 하고 가던 독일 산모가 생각이 난다. 독일에서는 출산 당일에 퇴원하는 게 별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나는 그 친구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독일의 보험이야기
독일에서 처음 비자를 받을 때, 무조건 의료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어야 그 기간만큼 비자를 준다.
어학연수를 하는 동안은 개인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대학에 들어가거나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공보험에 들 수가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소득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가족의 경우 한 달 의료보험료는 세전 월급의 10프로 정도 된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세전에서 계산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체감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공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 병원 진료비, 수술비등을 내지 않는다. 입원을 했을 경우도 하루 10유로(15000원 정도) 냈던 거 같은데 아마도 이건 밥값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엑스레이, 초음파, 내시경, CT, MRI 등등도 다 의료보험에서 커버가 된다. 그러니까 아플 때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돈은 없다고 보면 된다. 약국에서 약을 탈 때는 돈을 낸다. 그것도 의사의 처방전이 있는 경우 5유로의 기본 금액만 내는 것들이 많다.
아이들의 치아교정의 경우도 의사의 소견으로 교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면 전체 금액의 20 -30퍼센트만 내면 된다. 그리고 내가 낸 금액은 연말 세금 정산에서 공제가 된다.
수술
새로운 병원으로 진료를 가면 으레 적는 문진서가 있다. 거기에는 수술 이력을 적는 란이 있는데 나는 둘째 낳았을 때의 '제왕절개'와 '치질 수술'을 적어 넣는다.
예전에 친구가 세상에 극심한 고통이 2가지가 있는데 그게 출산과 치질 수술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게 웃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두부문에서 모두 경험자다. 만약에 둘 중에 한 개를 한번 더 꼭 해야만 한다고 가정을 하고 선택을 하라면, 나는 출산을 택하겠다.
나한테 치질 수술은 출산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특히 수술 후 첫 배변을 할 때 나는 정말 엉엉엉 소리를 내며 펑펑 울었다. 출산을 생각하면 그때 힘들었지, 하고 웃을 수 있지만 치질 수술 때를 떠올리면 웃을 수가 없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독일에서 수술할 때의 주의점이 있다면, 의사의 물음에 적극적으로 내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어느 의사에게 진료(수술)를 받을지, 혹시라도 수술의 절개는 어느 방향으로 하고 싶은지 등등을 묻는다면 말이다. 절대로 상관없어요! 라거나 선생님 좋은 대로 해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치질 수술 후 마취에서 깰 무렵, 내 옆에서 어느 나이 든 의사와 젊은 의사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막 마취에서 풀려 깨느라 내용은 잘 듣지 못했지만, 나이 든 의사가 젊은 의사에게 훈계하는 것이 분명한 뉘앙스였다. 눈치로는 젊은 의사가 뭔가 잘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깬 것을 눈치챈 나이 든 의사가 갑자기 말을 멈추며, 깨어났어요? 하며 말을 걸었다. 수술은 잘 되었으며 이제 병실로 옮기겠다고 했다.
나중에 퇴원할 때 고지된 사항이었지만, 수술 후 상처를 봉합할 때 항문이 약간 좁게 꿰매 졌다고 했다. 그건 수술 전 수술동의서에 쓰인 사항이었다. 수술 후 상처 봉합 시 약간 좁게 되거나 헐겁게 될 수 있다고 했고, 비상시에 수혈을 하게 될 경우 혹시라도 나중에 감염된 혈액이었음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병원의 책임이 없다는 등의 항목이 있었는데 사인을 해야 수술이 진행되고 이런 경우는 없지만 혹시의 경우를 대비해서 동의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사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인을 했는데, 항문의 봉합 시 헐겁거나 좁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일이라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배변이 예전처럼 편안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유추해보기로, 아마도 그 젊은 의사가 항문 봉합을 했거나 아니면 내 수술을 집도했을 수 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수술 후 그렇게 심각하게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아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는 언니는 맹장수술을 하러 병원에서 수술 담당의사와 상담을 하는데, 절개를 세로로 할까 가로로 할까 물어보더란다. 언니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 편한 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선생님은 세로가 편했는지 배를 세로로 절개해서 수술을 했더란다. 이제 비키니는 다 입었다며 그냥 가로로 해주세요!라고 할걸 하며 언니는 후회를 했다. 우리식으로는 '보통의 상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독일은 그런 '보통'이 별로 없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일화다. 그 후로는 나도 내 의견에 분명해야지! 결심을 했더랬다. 물론 이 일은 10년 전의 일이니 지금은 세로로 절개하지는 않을 거 같긴 한데, 또 모를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