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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라고 불립니다 Oct 24. 2021

네오나치와의 아찔한 대면

그날의 추억

얼마 전, 독일의 총리였던 메르켈은 16년간의 정치 생활을 마치고 은퇴를 했다.

독일 길거리에는 그동안의 메르켈의 노고에 감사하는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고, 메르켈을 기념하는 굿즈(?) 같은 것들도 소량 제작하는 곳들이 있었다고 한다.

메르켈 맥주(사진 Spiegel)
홀로코스트에서 묵념하는 메르켈(사진 Spiegel)

내가 독일에서 살면서 체감하는 메르켈의 평가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물론 어디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고, 특히 난민 유입 시기에는  'Merkel raus!' - ' 메르켈 물러가라!'라고 써붙인 차를 본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메르켈의 집권 시기에 안정감을 느꼈다고 한다.

어느 날 메르켈이 은퇴를 하면 한 달에 15000유로(약 2천만 원)의 연금을 받는다는 뉴스 기사를 접하고, 큰 아들에게 "와, 많이 받는다, 그렇지?"라고 하자,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큰 아들은 "엄마, 그거 많은 거 아니에요. 16년 동안 정치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요? 정신적인 보상을 생각하면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라고요"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평소 금전적인 부분에는 전혀 후하지 않은 짠돌이 아들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머쓱해졌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래, 그랬다. 사실, 메르켈은 청렴해서 더 독일인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 긍정적인 평가의 한 부분이 금전적인 부분들에 깨끗했다는 점도 있다.

이번 선거는 메르켈의 은퇴 영향인지 몰라도 집권당이던 CDU의 표가 줄어들고, SPD와 Gruene가 늘어났다는 둥의 뉴스를, 정치에는 그다지 밝지 못해 건성건성 보다가 수치가 나오는 그래프에서 극우당 AFD의 지지율이 부쩍 오른 것 같아 놀라서 아들에게 물었다.

"이거, NPD(말하자면, 나치 추종당(?))랑은 다, 다른 거겠지?" 

그러자, 아들이 "음, 다른 당이긴 한데 NPD에서 여기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왜 이 정당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설명하는데...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잊고 있었던 아찔한 추억(?)이 떠올랐다.


2002년 봄, 독일 남부의 Passau(파사우)라는 곳에서 작은 콩쿠르가 열렸다.

독일로 유학을 와서 처음으로 나가는 콩쿠르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그냥 담담하게 '여행 삼아 한번 가자!'라고 했다.

학교의 친한 동생과 남편, 나 이렇게 셋은 2001년 봄 그렇게, 처음으로 독일에서 기차여행(?)이라는 것을 떠나게 된다.

우리가 사는 로스톡이 북쪽 끝이라면 우리가 갈 곳, 파사우는 거의 남쪽 끝이었다.

빠른 기차 시간만으로도 족히 7시간이 걸리는 파사우. 기차비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독일의 기차비는 어마어마하다. 반 카드라는 연회비 있는 할인카드가 있으면 연회비에 따라 25프로 50프로 100프로 할인율을 적용해서 기차표를 싸게 살 수 있고,  얼마나 미리 끊느냐에 따라서도 기차비가 달라진다. 가끔 나오는 할인 기차표와 지역 기차를 이용하면 절약을 할 수 있어서 어떻게든 그렇게 활용해서 기차표를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기차비 정가는 경우에 따라서 비행기표보다 비싸기도 하다.

그 당시 우리는 유학생 신분에 게다가 젊었으니, 어떻게든 가장 싼 표로 가는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주말 기차표. 5명이서 저렴한 가격에 독일 전역을 여행할 수 있다. 단 ICE 같은 고급 기차가 아닌 주 지역 기차라 주마다 갈아타야 하는 기차를 이용해야 해서 환승 횟수가 상당했다.

  Regionalbahn(지역 기차)- 사진 Wikipedia

 지역 기차 내부 2층 - 사진 Wikipedia


그래도 우리는 젊은 패기가 있었다.

기억으로는 파사우까지, 한 1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 긴 시간을 자고 먹고 보드게임도 하며 그다지 지루한 줄 모르고 다녀왔다(지금 같으면 스마트폰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그때는 핸드폰으로는 전화만 가능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여행하듯(?) 콩쿠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5월 1일 노동절인 휴일이었다.

환승을 위해 라이프치히라는 역에서 촉박한 시간에 기차를 갈아타야 할 때의 일이다.

우리가 타려는 기차에 한동안 경찰들이 서서 탑승을 못 하게 했었는데, 기차에 문제가 있나? 하며 별다른 생각을 안 하고, 지연되는 기차 시간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급히 점심으로 먹을 조각피자를 사러 갔다.

다녀오니 경찰들이 여전히 플랫폼에 서있었으나 탑승을 시작했고, 기차 앞 쪽은 경찰들이 서서 못 가게 하고 뒤쪽으로만 타게 해서 그저 기차 앞쪽이 무슨 문제가 있나 보다 하고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뒤쪽만으로도 자리는 넉넉했다. 다만 검은 옷을 입고 피어싱을 하고 체인 등의 장식으로 한 젊은 무리의 사람들이 큰소리로 떠들며 노래를 하며 우르르 우리가 타는 기차를 타는 게 조금 걸렸다. 그래도 아, 웬만하면 다른 칸에 타야겠다. 뭐 그 정도만 생각했던 것 같다.

기차가 출발하고, 자리를 잡은 우리가 피자를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가 앉은 의자 옆에 있는 유리 칸막이에 퍽! 하고 뭔가가 날아와 부딪히고 떨어졌다. 피자 한쪽을 베어 물다가 무심코 바닥을 보다, "응... 돌? " 하고 인지하는 순간에 우당탕탕 소리가 나더니 그 검은 옷의 무리가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뭔가 쾌쾌한 낯설지 않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주 맡아보던 추억의 냄새... 최루탄??? 하고 생각하는 순간, 연기와 비명소리와 뛰어다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외쳤다. "뛰어~ 뒤쪽으로!!!"

아무 영문도 모르는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차 뒤쪽으로 뛰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작은 역에 멈춰 섰다. 그리고 또다시 "내려!"하고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사람들이 달려가는 데로 냅다 도망을 쳤다. 정신없이 뛰어간 곳은 역이 아닌 기찻길 사이의 부지였고, 먼저 내린 사람들이 모여 서있었다. 그때까지 아무 영문을 몰랐다. 왜, 뭐 때문인지... 그러는 찰나에 검은 옷을 입고 사슬을 질질 끄는 무리 중 서너 명이 헥헥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너무 무서웠다. 왜, 왜, 우리에게 오는 거지? 공포가 몰려와 거의 울음이 터지려 했을 때, 그중 마법사같이 큰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입술을 칠한 한 사람이 모자 앞 쪽을 치켜들고는 나를 보며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하고 물었다.

"으응?"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의 눈과 마주쳤는데...

너무너무... 맑은 눈? 게다가 나를 걱정해주는 눈빛이, 진짜 진심이다.

왜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때, 그들 중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 아시아 임산부는 어딨어?"

"어, 아까 ㅇㅇ가 데리고 나왔어." 

"아, 다행이다. 다른 외국인들은? 다 피했어?" "너희는 괜찮아?" 하며 보라색으로 눈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애가 문신이 가득한 팔로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그들 중 한 명이 한 말은 이러했다.

기차에 네오나치(신나치, 예전 나치를 추동하는)들이 타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들에게 말장난을 했다. 그래서 네오나치들이랑 시비가 붙었다.

오늘 라이프치히에서 네오나치들이 데모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데모를 반대하러 나갔다. 우리는 네오나치를 반대하는 모임이다. 네오나치들은 외국인을 공격하니까 조심해야 되니, 우리랑 여기 있어라. 하면서 동그랗게 우리를 둘러싸고 서 있어주었다.

그때, 옆을 보니 남편이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그때서야 남편이 없는 걸 알았다.

"어? 어디 갔지?" 내가 발을 동동 굴리며 걱정을 하자

"빠져나온 거 아니야?""아직 기차에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그중 한 남자가

"내가 가볼게!" 하며 기차로 뛰어갔다. 그 남자가 기차 쪽으로 뛰어가는데 기차역에서 캐리어 2개를 낑낑대며 끌고 남편이 나왔다. 와서 하는 말이, 방을 안 들고 온 게 생각이 나서 다시 들어가서 가방을 가져왔단다.

조금 뒤 도착한 경찰들이 도착했고, 기차역에 들어가 수습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오게 한 뒤 기차에 네오나치들만 태우고 다음 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따로 타고 갈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가방을 끌고 맨 끝에 나온 남편에게 검은 옷의 무리들이 이전 상황을 물었다. 그들은 플랫폼에서 돌을 던지며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남편은 뛰어나오다가, 아차! 가방 하는 생각에 다시 기차에 들어갔고, 다행히 모두들 플랫폼에 나와서 싸우느라 기차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가방을 끌고 나오는데 검은 옷의 무리 중 한 명이 "너도 싸울래?" 하며 돌을 쥐어주더란다. 그래서 "아, 아니, 나는 아내가 기다려서 가야 해"하고 다시 돌을 돌려주고 가방을 끌고 나왔단다. 남편의 천진난만한 설명에 나는 울다가 웃어버렸다. 그 상황에 서로 돌을 주고받는 모습이 상상이 서 너무 웃겼다.

다음 기차는 다음 역인 조금 큰 역에서 갈아타야 했다.

그곳에는, 경찰관들과 함께 먼저 타고 갔던 신나치들의 기차가 잠시 서있었다. 그 기차는 Magdeburg(막데부르크)로 간다고 했다. 우리 기차를 기다리느라 플랫폼에 앉아있던 나는 그 기차를 타고 있던 한 신나치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경멸하는 듯하기도 하고,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으로 자신이 탄 기차가 떠날 때까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 눈빛이 생각이 나고 그 후 한참 동안 기차를 타지 못 했던 것 같다. 새벽시장에 생선을 사러가는 곳도 20분 정도였지만 기차를 타고 가야 해서 한동안 못 갔었다. 그 정도로 트라우마가 생긴 아찔한 기억이다.

독일 선거에서 극우정당인 정당의 지지율이 오르는 것을 보고 생각난 일화다.

그토록 충격적인 경험이었건만, 2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그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저 그런 나쁜 꿈을 꿔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정도로.

이 글을 쓰다가 좀 더 정확히 써보려고 그다음 역이 어느 역이 어디였는지, 경찰이 늦게 왔었는데 얼마나 걸렸었는지... 등등을 남편에게 물어보니, "맞아, 우리 그런 일이 있었지" 하더니,

"응? 몰라, 기억이 안 나"하며 하던 일에 몰두한다.

사람의 망각이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참 다행인 기능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다 잊어버리고  독일에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 수 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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