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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라고 불립니다 Aug 09. 2021

독일에서 산 20년을 되돌아보며 쓰는 글

- 그리고 오늘 , 또 하루를 보태며 시작해본다.

남편이 나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주로 둘이 함께 독일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하고 온 다음에 하는 말이다  

"참, 당당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야?" 

독일에서 21년째 살고 있지만, 독일어를 참 어이없게 하는데-'어이없게'란 독일에서 태어나 원어민처럼 말하는 2세인 큰 아들이 내 독일어를  표현할 때 하는 말이다-

누굴 만나든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말하고, 뭔가 잘 못 한 게 있어도 말투가 당당하단다.

그럼 상대방도 너무 당연하게 알아 들어주려고 애쓰고, 혹은 간혹 못 알아듣는 걸 미안해하면서 대화를 한단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든단다.

남편은 외국어에 재능이 있어서 독일 친구들에게 칭찬도 종종 들을 정도로 독일어를 잘하고 성악을 해서 발음도 좋다. 당연히 나보다 독일어를 더 잘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학교, 병원, 관공서일... 메일을 보고 모임에 가고 전화통화를 하는 그 모든 일은 다 내가 해왔다. 다른 집들은 그런 일은 거의 남편들이 하는데 말이다.

남편 왈,  내가 하면 일이 더 잘 되는 것 같단다.

나를 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남편이 가서 정석대로 하고 오면 느리거나 명확하지 않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정석'대로만 일을 한다. 언제까지 어떻게 하라고 하면 응, 하고 그대로 한다. 반면에 나는 왜? 그럼 이렇게 하면 좀 더 빨라? 하면서 한국 아줌마의 근성(?)을 가지고 스피드를 올린다. 그러면 또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한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하며,  듣는 사람들이 황당하든 어쨌든 '어이없게' 독일어를 하면서 말이다.


오늘은 남편의 말을 들으며,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나는 왜 당당한 거지?

나는 독일에 사는 20년 동안, 말하자면 '인종차별'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조금 불친절한 사람은 어디나 있게 마련. 그게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상황은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내가 못 '느꼈다'였을 수도 있다. 상대방이 나를 차별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독일 친구들에게도 늘 주장하는 거지만, 나는 한국어를 참 잘한다.

한국사람이 한국어를 잘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좀 더 잘해"라고 말한다.

학창 시절 내내 국어는 수와 A+이 아닌 적이 없었기에, 늘 국어 부심도 있었다.

그와는 달리, 외국어는 소질이 없었다. 영어도 그렇거니와, 고등학교 때는 불어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1년 가까이 불어 과외를 받았는데도 나아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20년이 넘도록 독일에서 독일어를 쓰면서 살고 있다.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계획에도 없었고 상상도 하지 않았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시간일테니 또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산다.




2000년 9월부터, 나는 독일 북부의 로스톡이라는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남편이 로스톡 음대에 편입을 해서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나는 남편을 따라 그렇게 독일로 오게 되었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2번 하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살고 있다.

로스톡은 구동독지역이었고, 그 당시가 통독된 지 10년쯤 된 즈음이라 외국인들이 많지 않았고, 동양인은 더더욱 없던 때였는 데다가, 외국인이 많아지면 자신들의 일자리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기에 외국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였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아주 나중에 알게 된 것들이다.

그 당시 나는 신혼이었는 데다가 독일 생활의 모든 것이 신기했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재밌었기에,

모든 날들이 좋았고 신이 났다.

독일에 온 지  두어 달쯤 되었을 때였던가, 집 근처 슈퍼에 뭔가를 사러 혼자 나간 날이었다.

남편은 수업이 있었고, 나는 가벼운 장보기는 혼자서도 가끔 가던 때였다. 슈퍼에 가서 점원에게 말을 걸며 학원에서 배운 단어들을 써가면서 말을 했을 때, 점원이 알아듣고 대답해주는 주는 것에 나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즐기던 때였던 거 같다.

시계를 찬 사람이 보이면 괜히 시간을 물어보기도 했고, 물건을 고르는 사람에게 그건 뭐냐고 물어보기도 하는 등 짧은 독일어로 말하는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햇살과 바람이 좋았던 어느 날이었다. 하늘색 긴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깡충깡충 뛰듯이 슈퍼로 가던 기억이 난다. 그때, 길에서 한 할머니가 빤히 나를 쳐다보시며 가만히 서계신 것을 보았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시는 건가 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그 길에는 할머니와 나뿐이었다.  

내가 종종거리며 가는 내내 쳐다보시길래, 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 해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장본 것을 젊은 사람들이 들어다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기에.

그리고 늘 독일어로 말할 틈을 찾는 내게, 할머니와의 짧은(짧을 거 같은) 대화는 좋은 기회였기도 했다.


" Brauchen Sie Hilfe?"

- 도움이 필요하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파랗고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So Schoen. So schoene Frau. Sie sind Wunder schoene Frau"

- 너무 예뻐. 너무 예쁜 여자야.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짧은 데다가, 초급 독일어에 나오는  좋다, 아름답다 등의 쉬운 단어로만 이루어진 문장이어서 나는 단박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Dankeschoen"

-고맙습니다

"Brauchen Sie keine Hilfe?"

- 도움 필요 없으신 거죠?


"Nein, Aber Sie sind so Schoene Frau"

- 응, 괜찮아. 그런데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하시며 그 맑은 눈으로 내 눈을 맞추시며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 말씀하셨다.

계속 예쁘다는 말씀만 하시기에 나는 살짝 머쓱해서

그럼,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하고 얼른 슈퍼로 들어갔다.

내가 슈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할머니는 내 뒷모습을 보고 계셨다. 나는 뒤를 돌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한번 더 웃어드렸다.  할머니도 나를 보시며 또 맑은 미소를 지으셨다.

슈퍼에 들어가면서 내가 한 생각은,

' 아, 그래서 쳐다보신 거구나'였다.

'왜 예쁜 다신 거지'라든지 '와, 내가 예쁜가 보다'가 아니라 '아, 그래서...'였던 걸 보면, 갓 결혼한 사랑받는 신혼이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던 듯싶다.

그 후에도 어느 날, 친한 언니와 트램(독일 전철)을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민머리의 군인 같은 남자가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적이 있었다.

언니가 "야,  저 남자가 우리를 계속 쳐다봐. 무서워"하길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언니, 우리가 예뻐서 쳐다보는 거야, 웃어주자"하며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살짝 당황한 표정이 스치고는 이내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우리가 살던 도시에는 신나치가 많았는데 민머리에 군화를 신은 것이 신나치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은, 외국인을 혐오하는 신나치가 외국인인 우리를 지극히 혐오하며 쳐다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었는데, 그 당시는 시선을 거둔 것조차도 '쑥스럽나 보네' 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남편의 말마따나 참, 기가 찰 정도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독일의 트램


어쨌든,  그 자신감은 아마도 그때서부터 시작이 된 것 같다. 낯선 독일 땅에서 내게 호감을 보이는 동네 할머니와의 짧은 만남이 나는 여기서 호감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 셈이다.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긴장이 살짝 풀어진다. 그리고 조금은 안정적인 느낌 같은 것이 든다. 뭐든지 받아들여줄 것 같은 분위기는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렇게 나의 독일 생활은 찬란하게(?) 시작이 되었다.

'독일 사람들은 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첫인상으로...


                                           2000년  한적한 독일 시골 풍경


어디든 '한국'이 드러나는 모든 것들을 담던 시절, 기차역의 발 냄새 제거제 광고사진




ㅡ 에필로그 ㅡ

그 후 한참 시간이 지나고,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고 있던 중에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서너 명이 버스를 탔다.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며 떠드는 목소리들이 구슬 같았고 웃음들이 싱그러웠다.

여드름과 주근깨가 송송 있으나 뽀얀 얼굴들이 눈이 부셨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고왔고 웃는 얼굴이 맑고 예뻤다.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그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속으로 '아,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 순간, 아... 하는 깊은 깨달음에  웃음이 났다.

문득 예전의 그 독일 할머니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나를 보던 할머니의 눈빛은 내가 그들을 보는 눈빛, 그것이었구나.

젊음이, 이 싱그러움이 그때 나한테서 지금의 그들에게서 처럼 빛났었구나.

내 생김새가 정말 예뻤던 것이 아니고, 스물여덟의 내 젊음이 예뻤던 것이었구나,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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