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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Jun 15. 2021

숲 속 일기

양성 종양 같은 사념들과 이것들을 품는 자연으로의 여행

요 근래 아침이면 모닝콜 대신 목울대를 잡으며 잠에서 깼다. 아침 양치를 할 때는 콧물 빼는 게 주가 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감기 걸렸네?" 물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병이다. 빨리 낫고 싶지만 마음처럼 몸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내게 칭찬보다 질책이 쉬운 사람이다. 아침 샤워를 하면서 내 몸 하나 간수 못 하는 사람이라고 중얼거렸다.


건강검진으로 찾은 병원에는 <마음도 건강검진이 필요해요> 포스터가 벽보에 붙어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 쓰고 있는 게 어디 아프다는 신호가 아닐까? 섬뜩해졌다. 쉬어버리면 진짜로 일상이 멈춰버릴 것 같은 교만함으로, 그러나 내 줏대로는 아무것도 멈출 수 없는 나날들을 아쉬움으로 마음은 병들고 있었지도 모른다. 


건강검진 날이다. 소주잔 사이즈에 종이컵에 담긴 시약 두 잔을 꿀꺽 삼킨다. 수면내시경이다. 입에 불편한 호스를 끼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세요!" 직원이 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다행히 위는 깨끗하다고 한다. 다만 2년 전 복부를 찍었을 때 처음으로 발견된 1센티였던 양성종양이 1센티가 더 자랐다고 한다. 종양이 어떤 이유로 자란 건지 모르겠다. 6개월 뒤에 추적검사를 해보자고 한다. 남편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내 일상의 애매함은 이 종양 닮았다. 암도 아니고 궤양도 아니라서 수술로 제거하기도 애매하고 원인도 알 수 없는 원인불명의 덩어리.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곁에 두면 딱히 좋은 것도 아닌 덩어리.


사념이 많을 땐 산으로 가자. 주말에 남편과 심학산을 올랐다. 생리 날이라 퉁퉁 부은 다리로 숲 속을 걸었다. 이런 컨디션일수록 나는 더 걷고 싶다.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줄 알았는데 우리 부부는 거친 숨만 내쉬며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남편이 물었다. "기도했어. 우리 가족 잘 되라는 기도." 거짓말이다. 진짜 쉬어보자고 다짐하면서도 머릿속은 절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여보는 무슨 생각했어?"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어떻게 하면 집을 살까 고심 중"이라고 했다. 우리 둘 다 맞벌이에 이번에 둘 다 성과급도 올랐는데 내 집 마련과는 멀어지고 있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고. 열심히만 일하고 열심히만 사는 게 답이 아닌 걸까? 다른 대안이 필요한 걸까? 그래서 남편은 월급이 올랐는데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각자 바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지만 각자의 목표와 가까워지는데 매번 실패했다. "여보는 갖고 싶은 거 없어?" 남편은 생활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남편은 걸으면서도 한참을 고심하다 또 집 이야기를 꺼냈다. "집을 사고 싶어. 맥주를 시원하게 얼릴 좋은 냉장고도 갖고 싶어."


바람이 숲을 흔들었다. 어떤 때에는 바람의 온도도 갑자기 차갑게 바뀌었다. 바람이 왜 갑자기 차가워졌을까? 우리 부부는 서로 메아리 같이 서로에게 물었다. 바람이 갑자기 왜 차갑지? 서늘한 곳에서부터 불어온 건가 봐. 나무들은 각기 다른 신성을 품고 하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둘레길을 걷다가 숲에서 뭔가를 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눈을 마주치며 "고사리"라고 동시에 말했다. 어떻게 길을 걸으면서 고사리를 봤을까. 고사리를 줍는 사람들을 보고 난 후 나도 모르게 고사리가 있는지 주변을 살피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을 보면 강아지에 눈이 머물고, 철쭉을 보면 철쭉에 눈이 갔다. 


둘레길 코스를 완주하고 약천사라는 절 앞에 당도했다. 큰 불상 앞을 지나다가 나는 발걸음이 멈췄다. 소원 빌고 가자! 막상 소원을 빌려고 하니 아무 기도도 쉽게 뱉어지지 않았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집 사게 해 주세요. 작가가 되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 주세요. 이런 소원은 너무 격 떨어지잖아. 근데 나오는 소원이라곤 그런 것들 뿐이다. 실눈을 뜨고 남편을 보니 남편은 이미 기도를 마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기도드렸어?" 남편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여보 소원 잘 들어달라고 했지"라고 말했다. "이 불상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겠어. 비슷비슷하겠지. 그래서 난 소원 안 빌었어. 하늘도 헷갈리지 않을까?" 항상 맞는 말 대잔치인 우리 남편. 우리 또 오자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우리는 기절한 듯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여보! 나 사고 싶은 게 생겼어."


며칠 후 남편은 사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고 했다. 나는 다짜고짜 사주겠다고 답했다. 남편은 우리 집에 인테리어 소품이 없으니 스피커를 사자고 했다. "우리 집 소파보다 비싼 장식품을 들이자고?" 30만 원짜리 스피커를 사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짜증 반 웃음 반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월급 들어오잖아. 사고 싶은 거 사. 이북리더기도 제발 사!" 이북리더기도 살까 말까 고민한 것이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이번에 반값 세일하니 제발 사야겠다. 결국 월급이 들어온 걸 확인한 후에야 결제버튼을 누른다. 사고 싶은 것을 사는데 즐겁거나 설레기는커녕 오랜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게 마음이 억울해진다. 


안 쓰던 근육을 썼더니 다리에 근육통이 밀려온다. 다리를 주무르며 또 생각한다. 원인 모르게 생긴 양성종양, 숲에 불어온 차가운 바람, 남편의 애매한 위시리스트, 사고 싶었던 이북리더기, 종아리 통증. 삶의 불분명함과 애매함들 속에서 나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다고 생각하면 싫은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내가 좋다고 생각해도 싫은 존재가 되기도 하고 내가 싫다고 여겼던 것도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그 흔들리는 와중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계속 나아가다 보면 옳고 그름을 알게 될까? 이렇게 끝까지, 끝도 없이 애매하다면 어쩌지. 오래도록 미련한 사람은 되기 싫은데. 아, 제발! 또 사념이 밀려온다. 이러니 감기가 안 낫지. 이러니 몸이 아프지. 아, 산 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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