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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Sep 23. 2021

엄마의 자존감

워킹맘 다이어리

지방에 떨어져 사는 엄마와 자주 전화통화를 하는 편이다. 주로 우리는 근황을 말과 말로 써 내려가며 서로를 일기장처럼 마주한다. 어제 전화통화에서는 엄마는 대뜸 김미경 원장의 어머니에 대한 일화를 전했다. 10년 동안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지병을 앓고 계신다던 어머니는 어느 날 딸에게 재봉틀을 가져오라고 했다. 자신이 입을 옷과 자식들이 입을 옷 한 벌씩을 지어주고 싶다고. 어머니는 한 평생 자식들을 재봉틀 하나로 먹여 살렸다고 했다. "인생에서 이런 자존감 하나씩은 있어야 해." 어머니는 딸에게 호통 치듯 외쳤다고 했다. 


엄마는 이런 일화를 전하며 자신에게는 그런 자존감이 '책'과 '글'이라고 했다. 두 번의 신장암 수술, 만성신부전증으로 인한 신장투석과 신장이식. 오랫동안 병마와 싸워 결국 지금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엄마지만, 병실에 있을 때 엄마는 매일 기도 같은 꿈을 꾸고, 책을 읽고, '죽는 날까지 시를 쓰겠다'는 선언과 같은 시를 쓰며 견뎌왔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탓일까. 나의 자존감은 엄마의 자존감을 닮았다. 매일 찾아왔을 난해한 감정들에 이름을 지어주며, 정답과 오답을 가르지 않고, 꾸준히 내 것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엄마가 내게 보여준 자존감이었다.

사실 나는 오늘로 임신 8주 차가 되었고, 3살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다. 아이를 키운 이후로 책과 글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손목 보호대를 차고 일기를 쓰는 엄마를 보며 참 미련한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돌이켜 보니 나는 꼭 그런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 전혀 다른 문장이 되어있어. 그건 문장이 바뀐 게 아니라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지." 엄마는 또 수화기 너머로 문장 같은 말들을 써 내려갔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빼곡하게 적어놓은 일기와 독서노트. 엄마의 독서대 위에 올려져 있는 노트를 멀리서 보면 성경책 같아 보이기도 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웬 반찬 꾸러미가 택배로 도착해 있었다. 남편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니 친구의 어머님이 보낸 반찬들이라고 했다. 잘 지내고 계신지 안부를 물었는데 대뜸 반찬 꾸러미를 보내주셨다고 했다. 

 "요리 정말 잘하시는 분이야. 아직도 기억나. 점심시간에 학교 담장 너머로 친구에게 튀김을 건네주시기도 했어. 튀김은 바로 튀긴 걸 먹어야 맛있다고. 아들 친구인 나한테도 맛있는 음식을 자주 해주셨어. 가끔 친구보다 어머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친구한테 어머님 안부를 물었던 거 같아. 참 힘들게 사셨는데. 건강하셨으면 좋겠어." 택배 상자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반찬통을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굴도 모르는 분이 보낸 반찬. 그 반찬통 안에 알 수 없는 마음들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은 뭐랄까. 우리에게서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어떤 마음이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요즘 나는 임신을 해서 좋아하는 커피도,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못해 기분이 좋지 않다. 김밥 하나도 무서워 먹지를 못 한다. 믿을 수 있는 먹거리, 믿을 수 있는 근무환경과 양육환경, 믿을 수 있는 미래. 이런 것 따위 애초에 없었다는 듯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귓가에 맴돈다. 


"자존감 하나씩은 있어야 해." 


오늘도 믿을 수 있는 건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이다. 이런, 어쩌지. 반찬이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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