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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Oct 13. 2021

조건 없는 사랑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맥주 여러 캔을 샀다. 동네에 사는 친구 부부를 집에 초대했다. 맥주 여러 캔을 편의점 바구니에 맘껏 담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양팔에 잔뜩 힘주고 엉성한 자세로 언덕을 오르니 어깨가 축 가라앉고 뻐근해졌다. 몇 주 간격으로 새로운 거리두기 방역수칙이 발표되는 이때 사적 모임이라니. 그냥 사람 만나는 일일 뿐인데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나의 글쓰기 선생님은 너무 착하지 말라고, 더 회피하라 당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글쓰기의 세계에 눈을 뜬 후부터는 착해지지 않는데, 회피하고 게을러지는데, 매번 실패한다. 열심히 해서 착한 것인지 착해서 열심인 것인지 내가 맞게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매번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답을 듣는데도 아리송했다.


친구 부부와는 친구 부부가 신혼 희망타운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한 후 두 번째로 만난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축하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면접을 앞두고 빳빳하게 복도에 앉아있는 사람들 같았다. 당장 계약금 대출금을 알아보아야 하고, 월급으로는 도저히 충당이 안 되는 보증금도 대출해야 하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예비남편은 얼른 합격해서 취직도 해야 하고. 그런데 어쩐지 내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들을 듣다가 목구멍에 무엇이 낀 것처럼 꽉 막히고 아팠다. "우리 결혼하겠다고 양가에 이야기했어." 이번에도 기뻐해야 할 소식인데 다음 말을 듣고는 또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결혼식은 취업한 다음에.”



소모임을 시작한 지 세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말했다. "내가 10년을 한곳에서 일했는데. 가업을 물려받은 그 사람은 10년을 일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월급을 받더라고.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걸 알면서도 그 금액을 듣고 나니 엄청 허무해지는 거야." 그 후 나온 말에 나는 또 어떤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사는 게 답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잔뜩 사 들고 언덕을 오를 때처럼 어깨가 욱신거린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내가 얻지 못한 것들을 쉽게 얻고 있겠지. 오늘 글쓰기 수업에서 들은 이야기가 번뜩 떠올랐다. 선생님은 그걸 자격지심이라 부르지 않고, '조건'이라 부르시던데.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이라 부르시던데.


옆에 잠잠히 있던 남편은 오래된 편지 하나를 건넸다. 20대 때 캐나다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던 남편에게 친구 부모님이 써준 장문의 편지라고 했다. 남편의 친구 부모님이면 생판 남인데. 그 편지에는 친구 부모님이 젖먹이 아이를 키울 때의 일화가 적혀 있었다. 방문판매원으로 일해 맞벌이를 하던 친구 어머님은 남의 집 화장실 변기에 유축한 젖을 버리고 변기 물을 내리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내 새끼가 먹을 젖인데. 내 새끼가 먹고 있어야 되는데. 이게 뭐라고. 내 앞에 그 변기가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생판 남이 쓴 편지의 온도가, 편지 속 눈물의 온도가 너무 꽉 껴안아 아픈 엄마 품속처럼 뜨겁고 절대적이라고 느껴졌다.


친구는 말했다. "신혼 희망타운을 지원할 때는 가난을 입증해야 하고, 합격 이후에는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고 하고."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입증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파티가 끝나고 친구 부부는 떠났지만 내 활자들은 인공위성처럼 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변기에 버려지더라도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조건 없는 사랑’, 술을 마셔 잊어버릴까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둔 문구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이 되었다. 하루의 끝에서 포착한 이 문구는 내일 또 다른 문구로 하나씩 쌓여나갈 것이다. 너무나 뜨거워 절대적이라고 느낄 법한, 이 세상에 더 많은 조건 없는 사랑들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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