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했던 신규 시절
임용 고시 최종 합격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아빠, 나 합격이야!”
“진짜? 어디 봐봐! 이거 너 맞아? 정말?”
신규 발령장을 받고 합숙 연수에서
동기들과 서로 어디 학교 발령받았는지 얘기하는데
온라인으로 확인하기 전,
기도 했다.
“제발 00만 아니면 되어요.”
00시는 굉장히 멀고 시골이었다.
오픈한 순간, 좌절했다.
“00시네.”
그렇게 전철을 타고 서울의 끝에서 내려 경기도 버스를 갈아타고 한참을 들어갔던 그 시골의 학교에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서울의 학생이었던 난
어느 경기도 외곽의 깊숙한 00읍 00 중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엔 연령대가 중간이 없었다.
교장, 교감선생님 밑으로
거의 1,2년 차의 교사뿐.
중견 교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승진을 위해
이 외곽의 학교를 지원하신 분이었다.
1,2년 차 교사들은 2년의 시간을 채우고 바로
타 지역으로 나갈 준비를 하며 일하는 분위기의
그런 학교였다.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아서 내가 가야 했던 그런 학교였던 것이다.
”거기, 일어나라. 후드 모자 벗고 수업 들어.”
“아, ㅆ”
“너... 뭐... 뭐라고?!”
“저 자야 하니까 놔둬요.”
“너 이리 나와봐.”
(참고로 지금은 복도로 나오란 말을 하지 못한다. 학생의 수업권을 침해한다고, 그렇다고 한다.)
이 학생은 나의 교사로서의 첫 수업에서 쌍시옷을 날려주더니 그 뒤로 내 수업만 빠져서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교단에 서기 위해 배웠던
영어 교육론, 영문학, 영어 통사론은
15살의 무서운 중2가 쌍시옷을 날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이사비나 선생님, 000 학생 담임 선생님 되시나요?”
“네, 무슨 일이시죠?”
“여기 고고 상고입니다. 지금 000 학생이 저희 학교 학생과 싸워서 응급실입니다. 여기로 오세요. “
“네?? 네 바로 가겠습니다.”
그날 나는 우리 반 학생의 부모님과 함께 응급실에서 웃고 있던 000 학생과 진료를 3시간 기다렸다.
000 학생이 우리 반에 배정되던 날부터
모든 선생님들께서 나를 안쓰러운 모습으로
쳐다봤었다...
그 친구와 난 1년 간 참 다사다난했지만
그중에서도 참 기억에 남는 일은,
“얘들아, 프린트 잘 모아둬야 합니다. 이름 쓰세요.”
“아, 저 자야 돼요.”
슝~
내가 열심히 타이핑해서 만든 영문법 프린트가
내 앞으로 날아왔다.
하나의 종이비행기가 되어.
역시 나는 학생이 프린트에 이름 하나 쓰지 않고
수업도 전에 비행기로 접어 내어 나에게
던져줄 거란 예측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시절이었다.
1,2년 차 선생님들은 각양각색의 일을 겪어냈고
우린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더욱 돈독해졌지만,
일요일이 되면 그렇게 간절히 서고 싶었던
교단이 무서워, 월요일이 무서워 울어버렸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도 당시엔 참 부족했던 교사였지만
내 과목 잘 가르칠 것만 생각하고
야무지게 교실을 들어섰던 나 자신을
참 많이도 좌절시켰던 날들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학교는 나아졌나? 교실은 나아졌나?
흠...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