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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비나 Jul 15. 2023

무엇이 금쪽같은 내 새끼를 ‘금쪽이‘로 만드는가

권위를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

”얘들아, 종 쳤어. 앉아.

거기 육각이, 모자 벗고 일어나세요.

수업 시간에 자면 안 됩니다. “

“아 씨. 놔둬요.”

“수업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세요. “

“아, 놔두라고요.”

육각이는 다시 엎드린다.

“육각이, 이리 나와 보세요. 너 왜 수업 시간에 자세를 그렇게 하는 거니? 수업이 시작했는데 후드 모자 쓰고 엎드려있는 게 말이 돼? “

“아, 졸리면 잘 수 있죠. “

“...... 그럼 다음 시간에도 이렇게 할 거야? “

“네.”

육각이는 대답을 하는 데 단 1초의 고민도 없었다.

“난 그렇게 학생이 내 시간에 오자마자 자는 걸 볼 수 없는데? 그건 예의에 대한 문제잖아.”

“아, 그럼 저 선생님 시간에는 앞으로 그냥 수업 안 들어갈게요.”

“........”

   10년 전쯤, 임용 고시에 합격하고 신규 연수를 갓 마친 나의 첫 수업, 2학년 5반과의 첫 수업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수업은 시작도 못 했고, 39명 중의 한 명의 학생을 깨우기 위해 난 15분을 날렸다. 육각이는 그 뒤로 3주 동안 내 수업에 들어오지 않고 Wee클래스 선생님(교내 상담교사)과 함께 있었다. 신규 교사로서 꿈에 부풀어 왔던 교직 생활은 내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을 마주하며 마음의 상처로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는 “금쪽같은 내 새끼” 프로그램에 초등학교 2학년 생이 솔루션 대상으로 출연했다. 수업 시간에 시작된 금쪽이의 돌발 행동으로 교감 선생님까지 출동했다. 선생님들은 금쪽이가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여과 없이 나왔다. 이 학생은 선생님의 교권을 침해하여 교권보호위원회, 친구에게 폭력을 가해 학교폭력위원회까지 열린 문제가 많은 금쪽이 학생이었다.

 어제 자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서 내가 놀란 건 금쪽이가 아니었다. 금쪽이 같은 친구들은 생각보다 나의 옆 학교 초등학교에도 있다. 중학교에서도 만난다. 자세한 얘기를 다 할 수도 없이 수위가 높은 일들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내 동료의 목숨이 위험할 뻔했던 일들마저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금쪽이의 행위가 놀랍진 않았다. 그보다 학교폭력위원회(이하 학폭위),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렸음에도 금쪽이가 근본적인 원인이 개선되지 않은 채 같은 교실에 다른 아이들과 있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10년 전의 육각이를 지도 하느라 진을 뺐을 때에도 나머지 38명의 학생들은 내 수업을 듣지 못했다. 이렇듯 품행 장애나 반사회적 성향의 아이들이 교실에 있을 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상황을 오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체감하는 나머지 학생들이란 것이다. 여기서 육각이와 금쪽이를 온몸으로 대처한 사람들은 현장의 교사들이었다.


    3-4년 전에 미국의 중학교에 실습을 갔었다. 글쓰기 수업 중 한 학생이 집중이 안 됐는지 계속 수업과 관계없는 말을 큰 소리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사는 바로 교실의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5분도 채 안 돼서 상담사가 왔다. 아이를 바로 교실 밖으로 데리고 갔다. 미국은 교사의 가르칠 권리와 나머지 아이들의 학습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남자아이 두 명이 신체적으로 폭력이 오가는 상황이 있었는데, 바로 학교에 상주하는 경찰이 들어와 아이들의 싸움을 바로 제지하였고 그 둘은 교장실로 가야 했다. 교장선생님은 레터(letter)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에선 가정 통신문과 같은 편지를 ‘직접’ 이메일로 각 가정으로 보내 학생들을 방과 후에 남겨 지도하겠다고 전달했다.

이 두 가지 에피소드에서 교사의 역할은 단 하나. 나머지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킨 것이다.


    ‘무력감’이라는 감정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금쪽이가 교실에서 욕설을 하고 타인을 때릴 때, 교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때리고 있는 금쪽이의 팔을 세게 잡는다던지 그만하라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면 아동학대 신고를 당할 수 있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 지도했다가는 금쪽이의 학습권을 침해할 수 있고, 부모에게 정신과 진료를 권했다가는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질타를 받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아니, 사실 없다. 그저 교사는 상황을 기록하고 부모에게 안내하고 교감, 교장선생님께 보고하고 다시 또 교실에 출근해 다음 날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일의 연속일 것이다. 이 나날들이 계속되면서도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방치된 나머지 아이들이다.


    육각이나 금쪽이 같은 아이들이 학교 교육과정을 밟지 못하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 아이들은 미움받아야 할 존재들이 아니다.


    그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건 통제와 권위에 대한 인지다. 육각이와 금쪽이도 가르치면 변화할 수 있는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에서 통제와 권위를 가르치는가? 분명 몇 가정은 상식적인 양육방식으로 잘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학교의 상황을 10분의 1도 모른다. 집에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한 가족이 있고, 자기를 위안할 수 있는 자기만의 물건들이 있고 환경이 있는 곳이다. 학교는 각자의 기질과 각자의 문화가 있는 가정에서의 모습으로 똘똘 뭉친 각각의 아이들 20명이 한 교실에 모인다.

     가정에서 내 아이가 성실하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해도 학교에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 집단에 섞이면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통제를 받고 올바른 규범을 배워 체득하게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은 학교다.


    그런데 이젠 교사에겐 그런 통제권이 없다. 옛날 옛적 교사에게 뺨을 맞고 회초리를 맞던 시절에 대한 반향으로 사회는 교사에게 아동학대로 신고받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너무 극단에서 극단으로 가버린 부작용이 이제는 그 문제가 곪아서 터져버릴 지경이 된 것 같다.


     왜 교사의 지도가 거북하게 불편하게 느껴질까? 권위와 독재를 혼동해서다. 독재와 권위를 구분하는 한 가지는 바로 가르치는 이의 이익을 우선하느냐 아이의 이익을 우선하느냐에 있다. ‘독재’는 교사의 이익을 위해, 아이의 발전보다 교사가 쉽게 통제하고 싶어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는 아이의 발전을 우선하기 위해 통제하는 데 그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권위는 사랑,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빨간 불에 길을 건너고 싶어 달려 나간다. 당신이 아이를 빨간 불에 건너는 아이를 붙잡고 안 된다고 규범을 단호하게 가르친다. 그건 아동학대가 아니라 사랑이다. 당신의 아이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 사회적 규범을 알고 지키면서 자신을 보호하며 살길 바라는 마음이다. 교사들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아이들과 신뢰를 쌓고 권위를 갖고 아이들의 이익을 위해, 안전하고 행복한 성인으로 자라도록 가르치고 싶다.


     교사가 원하는 건 육각이와 금쪽이 같은 친구들이 학교에 없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하고 교사의 가르칠 권위를 침해할 때, ”그래선 안 돼. “라고 제지할 수 있는 통제권을 되찾아 주던지, 미국의 학교들처럼 교사를 지원하는 시스템, 매뉴얼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의 교사들이 무력감보다는 희망을 갖고 교육자의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미안하게도 여러분의 교사는 AI가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도 집에 가면 엄마고 아빠다. 교사들도 집에 가서 자신의 아이들을 케어하고, 집안일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허둥지둥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똑같은 직장인이다. 교사들에게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사실 사명감을 생각할 새도 없이 무력감을 느끼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매일 아침의 커피 한잔으로도, 정신과 약으로도 무력감을 달랠 수 없는 듯하다. 통제권을 주지 않는 교직에서 교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이기에 교사들은 이제 자신을 이끌고 상담 센터에 가고 정신과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또 출근을 한다.



작가의 이야기/

교사인 나의 아이도 ADHD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ADHD가 반사회적 성향이나 품행 장애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미디어에 비치는 것과 다르게 현장의 ADHD 아이들은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ADHD 아이들은 수다스러운 과잉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조용하지만 머릿속 생각들이 허공을 떠도는 주의집중력만 낮은 경우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부모에게 전화하여 아이의 적나라한 사생활을 알려주는 이유는 금쪽이를 미워하거나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소연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교사의 통제권이 없는 학교에서 결국 아이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 개입을 해야 하는 것은 가정의 양육자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아이의 행동들을 수화기 너머 들을 때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내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건가, 학교에서 왜 포용해주지 못할까 원망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교사로서 학교의 상황을 잘 알기에 계속 누군가를 원망하며, 정신과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에 아이의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나의 아이는 지금 행복합니다.

약물을 복용하고 학교에 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내 성취감을 느끼고,

매일 친구들과 즐거운 대화를 통해 행복을 느낍니다.


정말로 금쪽같은 내 새끼입니다.



*사진 출처- Lov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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