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것들을 지킨다는 건
편리하게 살고 싶다면 한국,
편안하게 살고 싶다면 캐나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한국은 정말 민원 처리에 발 빠르고, 불편한 것을 빠르게 없앨 수만 있다면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일 줄 아는 적응력이 뛰어난 나라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난 '키오스크' 문화와 무인점포 문화가 우리나라에 특히 많다는 것을 느낀다. 식당에 가도 카페에 가도 키오스크 주문을 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무인점포는 키오스크를 쓸 수 없으면 물건을 살 수조차 없다. 엄마 손을 잡고 은행에 가서 은행 직원을 만나 1,000원을 저금하겠다고 말해야 했던 그런 긴장되는 순간조차 느낄 필요 없이 이젠 ATM기나 모바일뱅크를 이용해서 모든 은행업무를 볼 수도 있다.
물론 기차역에 가도 영화관에 가도 직원에게 티켓을 살 수 있고, 여전히 식당에선 직원에게 직접 주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이는 노인분들을 볼 때면, 마치 내가 AI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서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정말 내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신문물을 만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생각이 날 때도 있다.
캐나다에서 1년 넘게 지내면서 정말 느리고 불편한 행정 처리에 왜 사람들이 '한국이 좋아'라고 말하는지 알게 됐다.
"한국이 좋지. 나가면 편의점 있고 병원도 바로 갈 수 있고, 모든 게 편리하잖아."
한국만큼 깔끔하고 안전하고 편리한 나라가 없다는 건 나도 동의한다. 캐나다에 오니 더욱 그렇다. 자꾸 안 터지는 인터넷이 답답해서 서비스 신청을 해도 한참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 갔는데 또 한참 기다려 만난 의사가 청진기만 대보고 아이가 괜찮으니 집에서 '쉬어라'라고 끝난 감기 진료, 영주권자가 아니라고 현금만 받는다고 하는 병원에서 무려 100달러 현금을 은행에서 빼와야 했다. 우체국은 툭하면 파업을 해서 내 소포가 한 달이나 밀린 적이 있었고, 은행에 가면 뒷사람이 기다리든 말든 은행원과 수다를 떠는 나라가 캐나다다.
그런데
일상의 호흡이 느리다는 것은 이런 거였다.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빠른 일상의 호흡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무엇보다 느리게 지내다 보면 그 일상 속에 녹아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스타벅스도 팀 홀튼도 패스하고 로컬의 작은 카페에 들어가는 우리 부부. 들어가면 모르는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미 아침에 카페로 출근해 옹기종기 앉아 계신다. 낯선 한국인 부부를 보고 '굿 모닝!' 커피잔을 들며 미소를 날리시는 할아버지들.
이 카페에서 주문을 하려면 한 명의 바리스타가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바리스타와 손님은 수다가 이어진다.
내 차례가 되었다.
"Can I get a black coffee?"
블랙커피(아메리카노 아님)를 시키고 그녀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오늘 눈이 엄청 많이 왔죠?"
"우리는 캐나다에서의 겨울이 처음인데 엄청나네요."
"내 친구 집 사진 보여줄까요? 오늘 문까지 차서 출근 못 했어요."
그녀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내게 페이스북 사진을 보여준다.
이 카페에는 키오스크가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이름을 알고,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나누는 스몰 톡의 경험은 분명 다르다. 키오스크에서 손가락 몇 번으로 주문했던 커피는 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녀와 나는 대화와 표정, 서로 나눈 웃음은 그림처럼 각인되어 있으니까.
뭐 인건비든 기술력이든 어떤 이유로든 몇 나라는 키오스크와 같은 기술을 빠르게 환영하며 받아들이겠지만, 캐나다가 여전히 여러 면에서 '느리다'는 건 어쩌면 왜 그런지 알 것도 같았다. 빨리 가면 빨리 갈 수 있겠지만 여전히 나만의 속도로 느리게 가고 싶다는 이 나라의 고집 같은 걸까. 나는 그게 고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부할 수 있다면 거부하고 싶으니까.
아이를 낳으면 알게 된다.
효율성보다 휴머니즘이 내 삶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35달러면 아마존에서 당장 살 수 있는 해바라기 그림보다 내 아이가 삐뚤빼뚤 그리고 거칠게 색칠해 놓은 해바라기 그림과 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틀린 철자로 적어둔 그림이 내겐 명작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름마저 느리게 가는 캐나다의 하늘을 보며, 오늘도 나는 구석구석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아이의 아깝지 않은 뒹구는 시간들과 화장끼 하나 없이 운동복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는 '나'도 바라봐준다.
이곳에선 내가 사람다울 수 있고, 느려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진다는 공유된 감정. 덕분에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