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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건

캐나다에서 만난 다양한 가족의 모습들

by 이사비나

캐나다에서 아이 친구 부모로 시작한 관계는 이제 가족의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몇몇 엄마는 나의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 부모들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단어가 있다.


"stepfather, stepmother"

새아빠, 새엄마.


"추수감사절에 뭐 하세요?"

"아 새아빠 집에서 모이기로 해서 거기 가요."

우리 옆집에 사는 R은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엄마가 있다고.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상실을 감히 알 수도 없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나 역시 크게 반응을 하거나 묻지 않았다.


네모 친구의 엄마 S는 자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 성격이 너무 좋아서 점점 집을 오가며 왕래를 했다. 그 엄마 역시 새아빠가 10대부터 자신을 키워주었다고 지나가면서 말하며 새아빠의 아들, stepbrother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자기와는 많이 닮진 않았다고 웃으면서.


'캐나다는 재혼 가정이 참 많구나.'

아이가 있어도 재혼하고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구나 생각했다.


앞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남매가 우리 아이들과 나이가 같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움에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 친구의 아빠와 엄마와도 반가운 악수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느 날 축구 클럽에 가니 그 아이들의 아빠가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순간 내가 엄마 얼굴을 잘못 기억하고 있나 헷갈렸는데, 그 집 아들 J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She is my stepmother. And this is my stepsister. 내가 본 엄마는 새엄마라는 설명과 J는 새엄마의 딸인 "stepsister" H를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J의 새로운 가족들을 하키 리그에서도 마주치고, 동네에서 같이 놀기도 하고 점점 친해지게 되었다.


문득 'step-'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GPT에게 물었다.

‘step-’은 원래 Old English(고대 영어)의 steop- 에서 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상실한(loss)” 또는 “부모를 잃은”이라는 의미였어요.
즉, steopchild는 ‘부모 한쪽을 잃은 아이(고아)’ 를 뜻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며 이런 식으로 변했죠:
steopfæder → stepfather : 부모를 잃은 아이를 돌보는 아버지
steofmoder → stepmother : 부모를 잃은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즉, 본래 의미는 ‘상실(steop)’에서 나온 말이었어요.
나중에 결혼을 통해 생긴 ‘새로운 부모’라는 의미로 확장된 겁니다.


이런 어원이 있는지 몰랐다. 아마 stepfather, stepmother이라고 부르는 아이도 부모도 사실 어원이 이렇게 왔는지는 잘 모를 것 같다. 언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어떤 단어에 담긴 의미가 변하기도 하고, 그 단어에 있던 시선마저 무의미해지기도 하니까.


어릴 때, 나는 우리 부모님이 이혼을 할 수도 있다거나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늘 당연히 두 분이 함께 가족으로 온전히 영원히 함께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교사가 되면서 다양한 모양의 가족들을 알게 되었다. 제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과 말하지 못하는 가정사에 대해 듣고 나면 내가 겪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어려움을 어떻게 들어주어야 할지, 또 어떤 부분에 도움이 필요한지... 참 서툴렀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계모'라는 단어에 담긴 '새엄마'의 부정적 이미지는 신데렐라부터 콩쥐팥쥐까지 우리들의 머릿속에 콕 박혔있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어보니 '이혼'은 꽤나 흔한 일일 수 있다는 것과 부부로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여전히 배우는 중이지만 말이다.)



"선생님, 부모님이 이혼하신대요."

모두가 하교한 교실에서 중학교 3학년 우리 반 아이가 다가와 울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왜' 이혼을 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데 엄마가 너무 슬퍼해서 차마 묻지 못했다고 했다. 16살의 아이는 나보다 키가 크고 마치 다 큰 아이처럼 씩씩했던 아이였는데 그 순간은 아이의 모습이 유치원 때로 돌아간 것처럼 여리고 무척이나 아기 같아 보였다. 아이는 부모의 이혼을 감당하기 힘들어했고, 부모 역시 한국 사회에서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이혼이란 과정을 어떻게 현명하게 밟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날 나는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캐나다에서 stepfather, stepmother이 많다 해도 캐나다 아이들도 부모의 이혼에 절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고. 다만, '너도? 나도?' 하는 느낌으로, 가족의 모양이 다양한 이 나라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건 분명 있는 것 같다.


앞집에 이사 온 J의 새 가족은 참 행복해 보였다. J의 step grandparents 새 조부모도 늘 J의 하키를 응원하러 와주신다.


이곳에선 ‘입양'도 새로운 게 아니다. 세모네모의 학교에는 입양된 아이들이 새로운 가족을 만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가족의 모양이 다양한 것.

'가족은 이런 모습이어야 해' 이런 기준이 없다는 것.

나는 그래서 이런 다양성이 존중받는 이 나라가 참 좋다.


한국에 살면서 '결혼은 이렇게 해야 해. 결혼할 땐 혼수와 집은 이렇게 해야 좋아.' '아이는 두 명은 낳아야 해.' '몇 살에는 학군지에 가야지.' '대학은 이 정도는 가야지.' '직업은 이런 게 좋은 직업이야.' 내가 찾은 기준보다 귀 따갑게 들은 기준이 더 많았다. 그게 내가 정한 기준이라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인생사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리가 없다.

행복한 일보다 슬픈 일이 더 많고,

성공보다 좌절이 더 많다.

"근데 그래도 괜찮아. 또 살아져."

정해진 기준에서 멀어져도 내 삶은 충분히 가치 있고, 여전히 또 내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그게 다양성의 가치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ADHD 아이를 키워도, 아이가 학교라는 환경에는 안 맞아도 괜찮지 뭐. 그래도 또 살아지니까. 이런 모양의 삶도, 신경다양성 가족이란 타이틀도 이곳에 오니 '너도 나도 ADHD'라고 하니 아무렇지 않아 진다.


Step-이란 단어가 변해왔듯, ADHD라는 단어에 담긴 한국 사회의 모든 시선이 분명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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