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우 Aug 29. 2024

이제 우리답게 안녕하자

별 게 다 감탄_부부 북미 여행기 #4




비행기가 안정감 있게 날고 있다. 몇 시간 전의 여권가방 '사건'은 없었던 처럼 까마득하게 잊히고 있다.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하늘에 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앞으로 뉴욕까지 15시간 동안 가야 한다. 장시간 비행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영화감상이 딱 좋다. 그러나 기내 모니터에는 재미없는 것들만 모아 놓은 것처럼, 볼만한 영화를 찾기 어렵다. 이리저리 채널 메뉴를 다가 옆에 앉은 남편을 보니 이미 영화를 하나 골라 열심히 보고 있다. 선택한 것이 신기해서 말을 걸었다.

"재밌어?"

"그냥 볼만 한데."


영화가 마음에 들어야 보는 나, 있는 것 중에 적당한 것 골라서 즐겨 보는 그, ‘많이 다르구나.’ 영화 사랑의 차이일까? 아니면 성격의 차이일까? 먹는 건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것과 호불호가 분명히 있다것은 우리의 공통점이다. 호불호의 경계선은 내가 좀 더 진해 보인다. 다른 데에 집중할 거리를 새로 찾을망정 관심을 더 이상 두지 않을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제한된 선택지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골라보는 남편의 이런 오늘따라 부럽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선택의 폭이 넓다면 살면서 다양한 경험과 즐길 기회를 더 가지게 될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인생 1막, 2막으로 크게 흐른다면, 그는 1막 1장, 1막 2장처럼 더 세부적으로 삶의 장면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갇혀있는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 별 거리가 없으니 역시나 심심하다. 때로는 이런 시간이 생기면 즐기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예사로 보이남편의 행동한 번씩 살피며 흥미롭게 관찰 중이다. 이런 처음이지 싶다. 얼굴 표정과 영화감상을 즐기는 평화로운 모습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왠지 나까지 편안하다. 오늘 새벽 자신의 실수에 대응과 지금 풍기는 여유는  차이가 없는, 순탄하게 이어지는 일상으로 보인다.


타인의 장점과 비교할 때 작아지는 느낌이 들곤 다. 이에 비해 남편의 장점은 많이 보이는 만큼, 나 자신도 커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면에서 기내에서 '할 일이 없었던 것'결과적으로 정말 잘된 일이다. 좀 더 존재를 살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를 위해서라도 남편의 좋은 점 찾기는 정신건강에 좋을 듯싶다.




지루함이 점점 늘어지기 시작하니 잔여 비행시간만 수시로 확인 중이다. 모니터 화면에서 북태평양을 나타내는 까만색 바탕에 비행기만 달랑 계속 보이더니, 어느새 낯익은 지명이 나타난다. 아들이 청소년기 때 몇 년간 유학을 한 곳이다. 보고 싶은 아이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도시다. 자동차가 오르막 길을 달릴 때면 맞닿은 하늘만 시야에 들어오던 인상적인 광경이 떠오른다.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을 충격받지 않도록 설명하는, 아픈 메일을 용기 내어 보낸 일은 가슴이 기억한다. '나는 엄마, 보호자'라는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자각의 시간이었다.


'그곳' 지명을 듣거나 쓰여있는 글자만 보아도 우리 가족, 자식 인생의 일부이기에 지금처럼 반응이 빨라진다. 뉴욕이 목적지이지만, 가는 도중에 만난 도시의 이름 하나로 추억들과 달갑지 않은 기억들까지 살아 움직인다. 지금 ' 시애틀'을 여행하는 중이다.





비행기는 대륙 동쪽으로 더 깊숙이 날아가고 있다. 곧 ‘뉴욕’이 닿을 듯하다. 오전 10시, JFK 국제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엄마 아빠 무사 착륙’이라는 메시지를 걱정하고 있을 아이들에게 보냈다. 미국 입국심사 분위기는 위축감을 주었던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여행자의 신뢰할 정보도 있겠지만 한국의 위상 덕분인지 심사관의 호의가 담긴 말투와 표정을 읽었다.


비행 15시간 만에 세계의 수도라 부르는 뉴욕, 지금 여기에 있다. 내 짝꿍은 외국에 오니 더 든든해 보인다.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와 인사를 나누고, 입국심사가 늦어지는 다른 팀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도 긴장하며 심사를 대기하고 있겠지?’ 어렵게 시간을 내어 기대를 품고 왔을 낯선 동행자들을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배가 점점 고파올 무렵, 모든 팀이 모였다. 좀 어색하다. 살짝 표정을 보니 그들도 ‘어떤 사람들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뉴욕에서의 첫 끼니를 해결하러 갈 예정이다. 낯선 이들과 걸어가며 남편과 나는 서로 얼굴이 마주쳤다. 말없이 미소를 짓는데, 자꾸 입이 벌어지려고 한다. 




우리에게 여행이란 외적으로는 가벼운 나들이지만, 이번에는 의미가 더 진해진 걸 느낀다. 각도를 달리 한 남편을 향한 시선을 가진, 변화하는 내가 되었기에 여행도 예전보다 다른 느낌이 들 거라는 예감이 든다.  새롭게 마주할 장소마다 만들어질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 안에서 나답고 우리 다운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JFK 공항을 천천히 벗어난 버스는 여행자들의 기대까지 한가득 채우고 달리기 시작한다.


뉴욕 도착, 첫 식사를 위해 이동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