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백을 향한 버스 안의우리 여행자들은연달아틀어주는 팝송을 다 같이 들으며 한참 달리는 중이다. 지금 웨스트라이프의 곡 <마이 러브>가 감미로우면서도 경쾌하게 퍼지고 있다.
혼자 버스 타는 걸 원래부터 좋아해개인 나들이를 갈 때는 언제나 고속버스를 탄다. 장 시간이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지니몸도 힘들지 않다. 음악 감상을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이어폰을 꽂은 채 끊임없이 몇 시간을 멍하니들으며 떠오르는 생각에 잠길 때는 마음이 평화롭다.과거의 기억도 좋은 것들만 걸러진다. 새댁으로서 시댁의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도여린 내가 잘 견디는 동안 단단하게 변할 수 있었기에, 고비가 생겨도 가정을 잘 지켜냈을 것이다.마음이 녹아내리는 이 시간,나 자신이 한결따뜻한사람이 된 듯하다.
지난날 우리 네 식구가 힘들었던시기를떠올리며'지금'이 얼마나 귀중한지 또 깨닫는다.버스 안 나만의 좌석에서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현재삶이 평탄해졌음을 되새겨 주고 행복함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수단이자 공간이다. 지금기사님이 선곡한 팝송들을 연이어감상하는 중이다. 기분 좋은 한숨이 나도 모르게깊이내쉬어진다. 곧 끝날 이 순간이기에정성스럽게음미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우리를 싣고 다니는 이 리무진 버스는 나만의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남편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늘 꾸벅꾸벅 졸기에,그동안 나는 ‘버스 타기’를 즐길 틈이 생긴다. 다시깨더라도간식 몇 개 먹고 얘기 조금 나누다 또다시 잘 때가 많다. 그래서여행 중에도 혼자 생각을 즐기는 나에게는 딱좋다.
이런 우리의 서로 다른 리듬은 불편함 보다는 서로 쉴 틈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수다를 떠느라 각양각색의 풍경을놓치기쉬운 친구와의 여행보다,갈수록 남편과의 여행이 편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각자의 생체리듬과 취향을 존중하는 실제적인 시간이다. 굳이애쓰며배려해 주는 것이 아닌, 그냥 그렇게 하도록 두는 것이다.
예전에는 뭐든 함께 행동하는 것이 여행하는 의미로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왜?"라고 하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적당히 여백을 남겨둔다. 이렇게'각자'와 '함께'를 조화롭게 즐길 수 있는 지혜는 둘만의여행을 여러 차례 같이 다니면서 터득한것들이다.일행 중 누군가 주도하거나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여행은 갈수록 매력을 못 느끼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초원의 지평선 위로 거위 털 이불처럼 몽글몽글한 모양의 먹구름이 땅에 닿을 듯 나지막하게 내려앉아 있다. 광활한 넓은 대륙의 크기만큼이나 저 평원이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집이나 나무에 가려 잠깐 그 풍경에 마디가 생길 뿐이다.먼 곳에서느리게 지나가는 풍경이라 달리는 버스에서도 감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자연의 풍광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 눈과 마음에 꾹꾹 담아 두었다.남는 게 사진이라고 하지만, 내 경우는 한참 두고두고바라보던인상이 더 오래갔다.옆에서 졸고 있는 남편은 이 광경을 제대로 못 봐서 참아쉽다. 그 대신 버스가 멈추면잠에서 깨어나 더 맑은 정신으로 그만의활기찬 모습으로 즐기며다니겠지?
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보다
드디어 우리는 퀘백 주에 들어섰다. 예쁘게 꾸며진 인위적인 풍경이라도다른 설렘이 있다. 멋진 자연 풍광과 인공의 미가 어우러진 곳, 모두 내 눈을 즐겁게 하고 감흥을 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남편은 버스에서 충분히 피로가 풀렸는지 내게포즈를 취해 보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엄청 찍었어. 이번에도건질 거 몇 장은 나올 거야."
예쁜 거리를 걷다가 남편이 느닷없이 웃기는 바람에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남다른 시선으로 해석하는 특유의 농담을오랜만에 들으니반갑기도 하고 사람이신선해보인다. 이렇게 숨을 못 쉴 정도로 웃은 게 얼마만인가! 남편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상처의 쓰레기를 정말 쏟아 버린 것일까?유머감각이 되살아난 남편과 배꼽 빠지게 웃는 마누라.이 순간 더 이상 바랄 것이 뭐가 있을까? 오늘의우리를 기억해두리라. 크게 소리 내어 웃으니이제야놀기 위해 집을 떠난기분이 난다.
호텔방에 짐만 놓고 해지기 전에 얼른 로비에서 일행들이 다시 모였다. 퀘벡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모두의 설레는 마음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호텔 뒤편을 돌아가니 완만한 언덕의 초록 평원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가는 곳마다 온 감각을 건드렸다. 휘휘 둘러보는 내내 가슴이 뛰더니 자꾸만 몸이 들썩였다. 뛰고 싶다!그러나눈으로만 젊잖게 감상하는 일행들을 보니,나만 나잇값 못하는 것 같아 그냥 참았다.
‘혼자 쑥스럽게 뭘 뛰겠다고?’
‘아니야! 뛰고 싶으면 뛰는 거지.’
"여보, 나 여기서 막 뛰고 싶어!"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뛰었다. 이런 '자유분방'한 행동은 남편에게 의외의 모습은 아니다. 어릴 때 제재가 심해 억눌려 있던 잠재된 쾌활함은 결혼 후 정체가 이따금드러났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던 ‘내면아이’가이곳 여행지에서도 내내숨어서 관망하다가 어쩌면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이기에마음 놓고 튀어나온 것일지 모른다.
어릴 때 늘속으로만갈망했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몰래 느끼던 섬세한 감정은,내 속 어딘가에 붙어 있던 것들이다. 이것들이 토하다시피 툭 비어져 나온 모양이다.막상 뛰어보니 푹신푹신한 잔디밭은 생각보다 빨리 뛸 수가 없었다.'보이는 내 몸'만자라어른이 되어 둔해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어린 나’는 자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