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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 Oct 03. 2024

풀밭에서 뛰노는 아이

별 게 다 감탄_부부 북미 여행기 #9




퀘백향한 버스 안의 우리 여행자들은 연달아 틀어주는 팝송을 다 같이 들으며 한참 달리는 중이다. 지금 웨스트라이프의 곡 <마이 러브>가 감미로우면서도 경쾌하게 퍼지고 있다.


혼자 버스 타는 걸 원래부터 좋아해 개인 나들이를 갈 때는 언제나 고속버스를 탄다. 장 시간이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지니 몸도 힘들지 않다. 음악 감상을 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이어폰을 꽂은 채 끊임없이 몇 시간을 멍하니 들으며 떠오르는 생각에 잠길 때는 마음이 평화롭다. 과거의 기억도 좋은 것들만 걸러진다. 새댁으로서 시댁의 어렵고 힘들었시절 여린 내가 잘 견디는 동안 단단하게 변할 수 있었기에, 고비가 생겨도 가정을 잘 지켜냈을 것이다. 마음이 녹아내리는 시간,  자신이 한결 따뜻한 사람이 된 듯하다.


지난날 우리 네 식구가 힘들었 시기를 떠올리며 '지금'이 얼마나 귀중한지 깨닫는다. 버스 안 나만의 좌석에서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현재 삶이 평탄해졌음을 되새겨 주고 행복함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수단이자 공간이다. 지금 기사님이 선곡한 팝송들연이어 감상하는 중이다. 기분 좋은 한숨이 나도 모르게 깊이 내쉬어진다. 곧 끝날 순간이기에 정성스럽게 음미하고 있.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우리를 싣고 다니는 이 리무진 버스는 나만의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남편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꾸벅꾸벅 졸기, 그동안 나는 ‘버스 타기’를 즐길 틈이 생긴다. 다시 더라도 간식 몇 개 먹고 얘기 조금 나누다 또다시 잘 때가 많다. 그래서 여행 중에도 혼자 생각을 즐기는 나에게는 딱 다.


이런 우리서로 다른 리듬은 불편함 보다는 서로 쉴 틈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수다를 떠느라 각양각색의 풍경을 놓치기 쉬운 친구와의 여행보다, 갈수록 남편과의 여행이 편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각자의 생체리듬과 취향을 존중하는 실제적인 시간이다. 굳이 애쓰며 배려해 주는 것이 아닌, 그냥 그렇게 하도록 는 것이다.


예전에는 뭐든 함께 행동하는 것이 여행하는 의미로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왜?"라고 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적당히 여백을 남겨둔다. 이렇게 '각자''함께'를 조화롭게 즐길 수 있는 지혜는 둘만의 여행을 여러 차례 같이 다니면서 터득한 것들이다. 일행 중 누군가 주도하거나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여행은 갈수록 매력을 못 느끼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초원의 지평선 위로 거위 털 이불처럼 몽글몽글한 모양의 먹구름이 땅에 닿을 듯 나지막하게 내려앉아 있다. 광활한 넓은 대륙의 크기만큼이나 저 평원이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집이나 나무에 가려 잠깐 그 풍경에 마디가 생길 뿐이다. 곳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이라 달리는 버스에서도 감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자연의 풍광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 눈과 마음에 꾹꾹 담아 두었다. 남는 게 사진이라고 하지만, 내 경우는 한참 두고두고 바라보던 인상이 더 오래갔다. 옆에서 졸고 있는 남편은 이 광경을 제대로 못 봐서  아쉽다. 그 대신 버스가 멈추면 잠에서 깨어나 더 맑은 정신으로 그만의 활기찬 모습으로 즐기며 다니겠지?


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보다




드디어 우리는 퀘백 주에 들어섰다. 예쁘게 꾸며진 인위적인 풍경이라도 다른 설렘이 있다. 멋진 자연 풍광과 인공의 미가 어우러진 곳, 모두 내 눈을 즐겁게 하고 감흥을 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남편은 버스에서 충분히 피로가 풀렸는지 내게 포즈를 취해 보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엄청 찍었어. 이번에도 건질 거 몇 장은 나올 거야."


예쁜 거리를 걷다가 남편이 느닷없이 웃기는 바람에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특유의 농담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사람이 신선해 보인다. 이렇게 숨을 못 쉴 정도로 웃은 게 얼마만인가! 남편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상처의 쓰레기를 정말 쏟아 버린 것일까? 유머감각이 되살아난 남편과 배꼽 빠지게 웃는 마누라.  순간 더 이상 바랄 것이 뭐가 있을까? 오늘 우리를 기억해두리라. 크게 소리 내어 웃으니 이제야 놀기 위해 집을 떠난 기분이 난다.




호텔방에 짐만 놓고 해지기 전에 얼른 로비에서 일행들이 다시 모였다. 퀘벡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모두의 설레는 마음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호텔 뒤편을 돌아가니 완만한 언덕의 초록 평원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가는 곳마다 온 감각을 건드렸다. 휘휘 둘러보는 내내 가슴이 뛰더니 자꾸만 몸이 들썩였다. 뛰고 싶다! 그러나 눈으로만 젊잖게 감상하는 일행들을 보니, 나만 나잇값 못하는 것 같아 그냥 참았다.


‘혼자 쑥스럽게 뭘 뛰겠다고?’

아니야! 뛰고 싶으면 뛰는 거지. 


"여보, 나 여기서 막 뛰고 싶어!"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뛰었다. 이런 '자유분방'한 행동은 남편에게 의외의 모습은 아니다. 어릴 때 제재가 심해 억눌려 있던 잠재된 쾌활함은 결혼 후 정체가 이따금 드러났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던 ‘내면아이’가 이곳 여행지에서도 내내 숨어서 관망하다 어쩌면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이기에 마음 놓고 튀어나온 것일지 모른다.


어릴 때  속으로만 갈망했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몰래 느끼던 섬세한 감정은,  어딘가에 붙어 있던 것들이다. 이것들이 토하다시피 툭 비어져 나온 모양이다. 막상 뛰어보니 푹신푹신한 잔디밭은 생각보다 빨리 뛸 수가 없었다. '보이는 내 ' 자라 어른이 되어 둔해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린 나’는  자유로웠다. 

오늘 이곳에서 '진짜 나'는 신나게 놀았다.


뛰고 돌고 또 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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