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마음의 풍경을 만드는 일
그해 여름, 나는 태백의 깊은 산속에 있는 수도원을 향해 떠났다.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이란 공간이 자꾸만 마음을 끌었다. 누구의 말도 닿지 않는 고요한 산속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소음과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당시 나는 삶의 중요한 방향성을 잃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였지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누구의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를 뒤흔들려한다는 깊은 절망 같은 착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도, 찾지도 않을 것 같은 그곳에서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딱히 신을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공허함만 가득한 질문에 답해 줄 신을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기차를 타고 태백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로소 여행자 마음이 되어 주변도 둘러보는 여유가 생기자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 앉은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부부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 우리가 탄 칸에는 여행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그 가족과 나뿐이었다. 아이 특유의 칭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부부는 따뜻한 미소로 아이를 감쌌다. 엄한 말대신 눈짓과 손끝으로 아이를 달래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이는 몇 번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그들과의 인연은 태백 역에서 서로 눈인사를 나누며 끝나는 줄 알았다.
심하게 덜컹거리는 버스에 내려서도 깊은 숲길을 한참 더 걸은 후 도착한 수도원 앞에서 난 다시 그 가족과 마주쳤다. 서로 놀랍기도, 반갑기도 한 마음에 “ 어머, 어머, 여기서 또 만나네요” 라며 손을 마주 잡았다. 같은 곳을 향해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기 위해 떠나왔지만 우연한 인연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수도원에서의 하루, 하루는 조용했다. 숲은 짙고 공기는 맑았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산속에 어둠이 내려와도 그 육중한 밤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 힘들지만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기도소리, 그 낮은 속삭임이 꼭 나를 위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건 수도원이 주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수도원을 떠나는 날, 그 가족이 내게 말했다. “삼척 지인 집에 방문할 건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바닷가 근처라 해수욕도 즐기고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이상하게 망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예고에 없던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많은 홀로 여행 중 짧게 또는 긴 시간 동안 동행의 인연을 맺었던 만남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가족 모두와 함께 움직이며 같이 먹고, 자고 휴가를 즐겼던 인연은 지금 생각해도 참 특별한 경험으로 떠 오른다. 지인의 집은 이제 막 짓고 있는 중이었다. 반은 집의 형태였고 반은 아직 지붕도 없었다. 굉장히 어수선한 상태였을텐데 그 가족과 낯선 나까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인의 딸은 처음 보는 나에게 선뜻 자신의 방을 공유하게 해 주었다. 몇 살 언니인 내가 편했는지 늦은 밤까지 여고생다운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반쯤 노출된 지붕 아래서 바라본 별빛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다음 날 우리는 다 함께 바다로 향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외진 길을 한참 걸은 후에 만난 바다는 놀라울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팔월 중순, 성수기가 끝난 후의 바다는 우리만을 위해 대관해 놓은 무대처럼 자유롭고 한가로웠다. 입은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동해바다의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팔월의 뜨거운 태양, 소금기 가득한 바람, 발끝을 간질이는 파도까지 그날의 바다는 완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욱 특별했다.
그렇게 바닷가에서 하루를 온전히 즐긴 우리는 강릉으로 향했다. 나는 마음속 비밀병기처럼 간직해 두었던 밥집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누가와도 넉넉히 내어주는 고봉밥, 갓 튀긴 생선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곳. 늘 활기가 넘치는 주인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은 덤으로 가져갈 수 있는 시장 안쪽 작은 밥집이었다. 며칠 동안 나를 가족처럼 품어주고 여름의 한 페이지를 함께 채워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작은 감사의 표시였다.
처음 이 여정을 떠날 때, 내가 마주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채로 잠시나마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필요했었다. 조용히 숨어있고 싶었다. 하지만 뜻밖의 만남은 나를 다시 세상 속으로 이끌었다. 사람들 속에 머무는 게 따뜻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그 조용한 동행은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내 인생에 들어왔다. 평범할 수 있었던 하루는 뜻밖의 만남으로 특별해지고 예상치 못한 인연은 내 삶의 한 자리를 채워주었다.
그 해 여름도 그랬다. 여행이란 때로는 목적지가 아니라 함께 머문 이들이 만들어주는 마음의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